제93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 거행
제93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 거행
  • 김민석 기자
  • arisoo9909@naver.com
  • 승인 2019.06.12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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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서울 중앙고등학교에서 개최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지난 10일, ‘제93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을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 체육관에서 개최했다.
 

‘제93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이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사진=국가보훈처]
‘제93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이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사진=국가보훈처]

이날 행사는 이병구 국가보훈처 차장을 비롯해 각계인사와 6‧10만세운동 관련 유족과 중앙고등학교 학생 등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행사는 내빈 축사, 독립군가공연, 역사대회 우수작품 발표 등 순서로 진행되었다.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에서 열린 ‘제93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에서 이병구 국가보훈처 차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에서 열린 ‘제93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에서 이병구 국가보훈처 차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6‧10만세운동은 순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인 1926년 6월 10일에 일어난 만세시위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 이후 서구열강의 원조가 소극적으로 바뀌고 일제의 술책과 탄압, 임시정부 내부의 불화 등으로 인해 항일무장투쟁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1920년부터 활발히 전개된 실력양성운동을 바탕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 등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양단정책에 말려 1925년 이후 좌절되었다. 또한, 만주에서 진행되었던 무장독립투쟁도 1920년 청산리대첩으로 절정을 이룬 뒤, 일제의 대토벌로 인해 러시아 방면으로 밀려났다가 자유시참변으로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국내외 기성세대들의 민족운동이 침체되어가는 상황 속에 1920년대 민족운동의 활력소는 학생운동이었다. 순종황제의 승하를 계기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 명이 민족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고,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을 결의하면서 ‘2천만동포의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 1만여 매를 인쇄했다.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에서 지난 10일 개최된 ‘제93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에서 중앙고 학생들이 독립군가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서울 종로구 중앙고등학교에서 지난 10일 개최된 ‘제93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에서 중앙고 학생들이 독립군가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또한, 중앙고등보통학교(이하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도 시위운동을 결의하여 인산일에 학생 2만 4천여 명이 도열했다. 중앙고보 학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감행했고, 연희전문학교와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가 합세하며 항일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군중도 합세하며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에 저지당했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 수는 서울에서 210명, 전국으로는 1,000여 명이다.

6‧10만세운동은 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제에 항거했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운동으로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다. 분열 위기였던 상해임시정부와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다리 구실을 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큰 횃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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