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특별전시가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송인호) 기획전시실에서 3월 1일부터 5월 26일까지 개최된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침탈과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조선이 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리고 세계 평화에 동참하기 위해 비폭력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근간이 되었다. 서울은 3·1운동을 기획하고 시작한 원천과 같은 곳이며, 평양은 서울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이 전개한 날개와 같은 곳이다.

무오독립선언서. 지난 2월 1일 육필초고가 발견된 무오독립선언서의 원본이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김세원 소장) [사진=서울역사박물관]
무오독립선언서. 지난 2월 1일 육필초고가 발견된 무오독립선언서의 원본이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김세원 소장)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이번 전시는 3·1운동의 체계적인 준비과정과 서울과 평양에서의 세세한 실행과정을 조명한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하루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1919년 1월부터 실질적인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고, 2월에는 이미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들이 함께 독립선언식을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2월 27일 밤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28일 전국으로 배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고양,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해주 9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공원 밖으로 나와 거리 행진을 시작하였고, 거리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참여자의 수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기미독립선언서 신문관판(김선배 소장, 천도교 중앙도서관 자료실 제공) [사진=서울역사박물관]
기미독립선언서 신문관판(김선배 소장, 천도교 중앙도서관 자료실 제공) [사진=서울역사박물관]

같은 시간 평양에서도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의 인사들이 각각 장대현교회 인근 숭덕학교 운동장, 남산현교회, 설암리교구당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인근 거리에서 함께 만나 연대하여 행진을 시작하였다.

전시는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 3·1운동의 기획’ 부분은 북촌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의 기획과 독립선언서의 인쇄 및 배포과정을 담고 있다. ‘2부 : 3·1운동의 실행’ 부분은 3월 1일 탑골공원의 모습을 재현하며, 서울과 평양에서의 만세운동을 날짜별로 사진과 유물을 통해 소개한다. ‘3부 : 지하신문과 격문’ 부분은 탄압에도 제호題號를 지키며 발간한 ‘조선독립신문’과 만세운동의 참여를 독려하는 수많은 격문을 소개한다. ‘4부 : 감시와 탄압’에서는 만세운동 중에 체포된 사람들이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법원의 판결로 구속된 일련의 과정을 소개하고 일제의 잔혹한 탄압 증거를 제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3.1운동기 국내, 일본, 간도, 연해주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가 100년만에 한자리에 모여 전시된다.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에서 발표한 두 장의 ‘독립선언서’, 천도교 중앙도서관 자료실에서 보관중인 ‘기미독립선언서 신문관판’이 원본으로 처음 소개된다. ‘기미독립선언서 보성사판’과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중인 ‘2.8독립선언서 일문판’, ‘조선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복제로 전시된다.

3.1운동 계보도(개인소장).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작성한 3·1운동 관련자 계보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3.1운동 계보도(개인소장).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작성한 3·1운동 관련자 계보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대한독립선언서’와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는 존재가 알려진 이후에도 일반 시민들은 그동안 복제본만을 열람할 수 있었으나, 이번 공개로 원본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중국의 연변역사연구소 故강용권 선생이 입수한 것이다. ‘대한국민의회 제2선언서’는 대한국민의회 직인이 날인되어 있어 진품임을 알 수 있다.

‘기미독립선언서 신문관판’은 최남선이 운영하던 신문관에서 인쇄한 것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신문관에서 조판을 한 뒤 보성사로 넘기기 전 확인을 위해 인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널리 알려진 ‘기미독립선언서 보성사판’과는 크기가 다르며 국호 조선(朝鮮)의 글씨가 바로 적혀 있다.

‘2.8 독립선언서 일본어판’과 ‘조선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1919년 2월 10일 일본 외무성 정무국에 접수된 것으로 일본어판은 처음 소개된다.

또한,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작성해 보고용으로 총독과 육군대신에게 보낸 ‘3·1운동 계보도’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이 ‘3·1운동 계보도’는 KBS 탐사보도부에서 취재 중 확인한 유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최초로 전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제가 어떻게 3·1운동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1운동(청관재 소장). 이응노 작가가 광복이후 1946년 첫 번째 3·1운동 기념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3.1운동(청관재 소장). 이응노 작가가 광복이후 1946년 첫 번째 3·1운동 기념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상하이의 신한청년회에서 발행한 기관지 ‘신한청년’(중문판 창간호)과 민족대표 48인의 판결문 등을 묶은 ‘원비잔몽圓扉殘夢’,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 선생의 유품, 1946년 해방 후 처음으로 열린 3·1운동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이응노 화백의 ‘3·1운동’ 그림도 함께 선보인다. 원비잔몽은 민족대표 등 48인의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종결서, 고등법원의 예심종결서와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을 한권으로 묶은 것이다. 원비(圓扉)는 ‘감옥’을, 잔몽(殘夢)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뜻한다.

평양과 관련해서는 평양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나인협 선생의 유품 19점과 평양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이자 의사 부부인 홀 부부가 가지고 있던 평양지도그림인 ‘기성도箕城圖’, 장대현교회, 남산현교회 등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이 시작된 장소의 사진 등이 전시된다.

진관사 태극기(진관사 소장). 백초월 스님이 진관사에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이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진관사 태극기(진관사 소장). 백초월 스님이 진관사에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이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독립선언서를 직접 읽어보고, 자신의 목소리가 탑골공원에 울려 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형 전시연출물이 처음으로 선보인다. 또한,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배포’, ‘경성 한 의사義士의 순국’ 등의 영상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격문으로 벽을 가득 채운 공간을 마련하여, 관람객이 마치 1919년 3월 1일의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기획하였고, 관람객이 스스로 격문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경성 한 의사義士의 순국’ 영상은 1919년 10월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한 신문 ‘신대한’에 연재한 ‘경성 한 의사의 순국’이라는 기사를 바탕으로 그린 만화가 박건웅 작가의 그림을 영상으로 제작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송인호 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하여 서울과 평양에서 3·1운동이 어떻게 준비되고 실행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또한 국내, 일본, 간도, 연해주에서 발표한 중요한 독립선언서가 100년만에 한자리에 모인 의미가 있다. 백 년 전 서울과 평양의 역사현장에 서서 그 함성과 기억을 되새기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라고 이번 전시의 의미를 밝혔다.

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 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 토·일·공휴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자세한 정보는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seoul.kr)를 통해 확인 할수 있다. 전시개막은 2월 28일 오후 3시. 문의 02-724-0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