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 사학은 광복 후 학계와 정계 그리고 문화계까지 모두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병도 사학은 일제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데 충실하지도 않았고 충분하지도 않았다. 이병도 사학의 유산 가운데 가장 큰 덕목, 아니 죄목은 서기전 2333년에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의 기록을 사실이 아니라 신화라 한 것이다. 단군을 말살한 세력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었는데 그들과 똑같은 소리를 냈으니 잘못이 분명하다. 일제식민사관을 짓밟아 없애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할 민족사학이 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다. 8.15광복은 일제식민사학을 무찔러 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새로운 국사가 탄생했어야 하는 기회였는데 엉뚱한 소리를 낸 것이다. 

이병도의 역사학은 일제와 똑같이 단군을 부정하고 고조선의 건국을 의심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영구히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조선사편수회를 두어 단군 말살작전을 폈다. 우리의 귀중한 고문서를 다 불태워 버리고 우리 역사를 왜곡한 적이다. 왜 이병도는 그런 기관에 20년간이나 몸담아 종사했으며 광복된 뒤에도 똑같이 단군을 부정했는가. 그것부터가 문제였다. 비록 그가 진단학회를 설립하여 일제식민사학과 투쟁한 것처럼 되어 있었으나 단 한편의 단군 논문도 수록하지 않았다. 딱 한편 있었으나 단군을 중국의 신이었다고 한 고고학자의 논문이었다. 그가 뒷날 단군 연구가로 높이 평가받게 되자 “이상한 사람들이야. 나는 단군을 부정하느라 쓴 논문이야!”라고 투덜거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학계에서는 그를 애국자라고 오해하고 있다. 논문을 읽을 줄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어도 그렇게 해석했던 것이다. 광복 당시 단군을 신화라고 생각하는 학자는 없었다. 특히 안재홍, 정인보는 단재 신채호를 민족사학의 대들보로 생각하고 우리 학계가 신채호에 의해 주도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채호는 이미 순국한 뒤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식민사관의 본산지에서 근무한 이병도가 『국사대관』을 쓰고 진단학회 편 『한국사』를 내니 단군을 부정하는 것이 대세가 되고 말았다. 
 
단군을 부정하는 세력이 또 하나 있었으니 공산주의자 백남운의 좌익세력이었다. 광복 후 정치는 우익화되어 이병도의 국사학이 지배하였으나 학계 일각에서는 좌익세력이 모든 나라의 고대사회가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하는 유물사관에 물들어 단군이 세운 이상적인 국가 고조선을 부정하였다. 그러다 보니 단재의 역사관은 재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북한 학계가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평양을 단군조선의 수도라고 하니 남한에서는 단군조선을 거론하는 것이 불법 또는 쑥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먼저 이병도의 단군사관의 어디가 일제식민사관을 닮았나부터 알아보자.  
 
첫째 이병도는 단군조선을 부정하기 위해 일본 고고학계의 일제식민사학을 빌려 썼다. 한반도에서 구석기가 나오지 않고 청동기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만 보아도 조선인의 선조는 어디서 흘러들어 온 유랑민이요, 벌여두면 영원히 원시사회에 살 민족이란 사실이 고고학이 증명해주고 있다. 조선인은 중국에서 청동기를 빌려다가 썼다. 스스로 청동기를 만들 머리가 없었다. 한반도에 신석기와 청동기가 함께 나오니 석기를 쓰면서 중국인이 청동기와 명도전을 갖다 준 것이다. 단군이 건국한 것이 중국사의 요순시대라 하지만 어떻게 석기밖에 만들지 못하고 반 지하실에서 사는 사람들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는가. 청동기를 만지지도 못하고 글자도 없는 신석기시대에 어떻게 조선이 나라를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일본 고고학자 이노우에(井上秀雄)가 직접 필자에게 실토한 바에 따르면 일본 고고학이야말로 금석병용기란 기상천외한 역사시대를 만들어 단군조선을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로 『삼국유사』 고조선 조에 중국의 사서인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하였으나 현재 전하는『위서』에는 그런 구절이 없다. 그러니 이름 없는『고기』를 인용한 부분의 곰과 호랑이가 굴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었다는 설화가 옳은 것이다. 그리고 기자가 와서 단군이 아사달로 수도를 옮겨 산신이 되었다는 말도 신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병도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주장이 단군에 대한 새 해석이라 주장하였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우리 역사를 연구했다는 학자의 말인데 이 말을 감히 누가 감히 반대하겠는가. 
 
셋째로 이병도는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 때문에 고조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한사군이 설치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구히 원시시대에 머물렀을 것이라 주장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없애고 나니 남는 것은 한무제(漢武帝)가 북한에다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이 남고 남한에는 일본의 여인 신공황후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한 사실이 남는다. 『국사대관』은 한사군의 설치를 인정하고 임나일본부의 설치에 대해서도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더 선진국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술하여야 하는데 모든 문화를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쓴 것이 국사대관의 특징이었다. 반도사관에 사대주의까지 곁들인 교과서가 바로 이병도의『국사대관』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문화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선생이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조선일보』의 사장 안재홍 씨가 주선하여 싣게 된 귀중한 원고다. 이 글이 없었으면 단군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일을 한 분인지 모를 뻔 했다. 단재는 단군조선 2000년사를 크게 전후 2기로 나누어 전기 1,000년을 단군조선의 전성기, 후기 1,000년을 단군조선의 분열 쇠퇴기로 구분하였다.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이 희귀하다 하여 단군조선을 없었던 나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단군 조선에 관한 우리나라 기록은 외침과 내란으로 훼손되어 없으나 중국에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거기에 보면 단군조선의 강역은 발해와 서해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한반도, 북으로는 만주(지금의 중국 동북삼성) 서쪽으로는 중국의 양자강 이북의 땅 산동반도와 중원 땅에 걸쳐 있었다.  
 
우리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을 높이 평가하지만 단군조선의 강역은 그보다 훨씬 넓었다. 서양사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동서양을 통일한 임금이라 하여 찬양하지만 단군이야말로 동양의 알렉산더였다. 알렉산더는 진시황처럼 악정으로 식민지 백성의 원망을 사서 순식간에 멸망하고 말았지만 단군조선은 이천 년 간 계속된 대제국이었다. 진시황과 같은 폭정의 나라가 아니라 민(民)을 소중히 여기는 민본주의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고조선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첫째 단군은 세 곳에 서울을 두고 지방을 다섯 부로 나누어 다스리는 삼경오부(三京五部)제도를 시행하고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와 수미균평위 흥방보태평(首尾均平位 興邦保太平)의 정치철학을 고수하였다. 고조선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통치하는 나라 이상국가(理想國家)였다. 이 부분은 『삼국유사』와 『고려사』그리고 그 밖의 여러 고기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단군조선은 동북아의 대제국이었으나 그 이전에 환인이 다스리던 동서 2만 리 남북 5만 리의 환국(桓國)이 있었다. 환국 신시 단군조선 그리고 그 후의 부여 삼한 삼국 고려 조선이 이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국맥(國脈)인 것이다. 이병도는 <신지비사>에 나오는 수미균평위의 한마디를 인용하지 않았다. 몰랐던 것이다. 1919년 최초의 삼일운동 독립선언문인 대한독립선언문 서두에 “우리 대한은 무시(無始) 이래로 우리 대한의 한(韓)이요 이민족의 한이 아니다.”고 하였다. 지금의 대한민국헌법 전문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이라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이병도의 국사대관은 헌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