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낯선 서구문명을 만나 얼떨결에 받아들였으나 우리의 전통문화는 다행히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문화가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서구문명의 핵심은 개인주의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 파생물이다. 그것이 결국 권리혁명으로 이어져서 오늘의 우리가 변종變種 되기 직전에 있는 것이다. 권리만 알고 의무를 모르는 것을 권리혁명 권리문화라 한다. 

지난 20세기가 개인주의와 권리문화가 극에 달한 시기였고 그것이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걱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문화의 등불은 꺼졌다 켜졌다 명멸明滅하고 있다. 지난 20세기에 서구문명은 두 차례 세계대전 아니 동서냉전까지 합이면 세 차례나 자초했고 6.25로 한반도가 쑥밭이 되어 수많은 젊은이가 억울하게 죽어갔다. 우리는 서구문명의 피해자지 결코 수혜자는 아니었다. 
 
올해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으로 우리 문화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우리는 매사를 남의 탓으로 돌려 우리는 책임이 없다고 변명해 왔다. 그러나 요번의 세월호 사건만은 그렇게 변명하기 어렵게 되었다. 가장 수치스런 것은 사건 발생 직후 어떤 이혼남이 세월호에서 죽은 자기 딸을 위해 단식투쟁을 벌인 사건이었다. 그 옆에 지난번 대선에 패배한 문 모라는 후보가 앉았다. 우리나라에 여태 이런 사람들밖에 없었는가 하고 개탄하는 사람이 많았으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우리 현대사를 뒤돌아보면 그동안 우리가 배운 것이 고작 민주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권리주의였던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미국보다도 먼저 권리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있고 사私가 있으며 공公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런 상식을 모르고 권리만 주장하는 사회가 되었다. 우리는 이전에 절대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권리와 의무, 사와 공을 함께 배웠다. 그런데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공사를 분별하지 못하는 애꾸눈이 된 것이다. 
 
조금만 자기 권리가 손상되어도 법에 호소하여 재판을 받아야 하는『베니스의 상인』이 된 것이다. 빚을 갚지 않으면 너의 살이라도 도려내겠다는 것이 서구문명인 권리문화이다. 그러나 모든 개인은 나라와 사회에 진 빚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가 먼저 끊겨 대가족이 무너지더니 이제는 부모와 자식 간의 핵가족까지 무너져 가고 있다. 그러니 남을 알 턱이 없다. 일가친척도 없는 사회가 되었다. 돈 때문에 모였다 헤어지는 사회가 된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200일 만에 가까스로 끝나니 곧장 공무원연금법 수정에 항의하는 항의데모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비리의혹 등등 사건이 이어져 편안할 날이 없는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독재정권과 싸워 이긴 사람들을 민주화투쟁의 의사義士로 모셔 독립유공자보다 몇 십 배나 더 많은 보상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준 것은 권리만 아는 개인주의 혁명이었다. 
 
권력투쟁이라면 지난날의 당쟁. 요즘의 여야투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권리 혁명이라면 아무도 모른다. 학교에서 권리만 배우고 의무를 모르는 아이들을 지금 밥까지 먹이면서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수능시험을 보고 하나같이 민주시민이라 자처하는 사회가 될 것이니 이런 큰 실수가 없는 것이다. 
 
일찍이 “개인주의는 민주주의 사회가 빠지기 쉬운 악덕이다”고 토크빌(1805〜1859,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이 충고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 즉 에고이즘에서 파생된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기만 알고 남을 모르는 개인주의는 역사가 없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나 가당可當한 문화이지 우리나라와 같이 역사가 오랜 나라에는 당치도 않는 이문화異文化인 것이다. 우리에게 개인주의는 몸에 맞지 않는 양복바지이다. 
 
필자는 대학에 다닐 때 사회학 강의를 수강하여 1학기 내내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와 게젤샤프트(이익사회)란 말을 귀에 혹이 날 정도로 들었다. 요즘 학생들 같으면 아마 수업거부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의 이행은 발전이 아니라 후퇴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우리는 퇴니에스(1855〜1936, 독일의 사회학자)가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가는 것은 잘못이라 충고한 것을 모르고 그리로 가라고 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것은 마치 손자병법孫子兵法이 전쟁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작전이라 한 것을 전쟁에서 이겨라고 가르친 것으로 착각한 것과 같다. 
 
1945년 8.15 해방이 되자 미군정은 한국을 게마인샤프트에서 게젤샤프트 즉 이익사회로 가야 한다고 가르쳐 한국을 제2의 미국으로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것이 옳은 것으로 알고 미국을 모본(模本)국가로 섬겼으며 미국을 숭배하게 되었다. 북한이 스탈린의 명을 받아 남한의 동족을 공격하여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남한에는 종북 세력이 남아 수도 한복판에서 북한을 찬양하는 토크 쇼를 벌이고 있다. 
 
가장 우리를 매혹시킨 말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는 빼앗을 수 없는 천부天賦의 기본권이 있다는 대한민국 헌법 조문이었다. 헌법은 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기분 좋은 말인가. 그러나 헌법 전문에서 빠진 것이 있으니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받은 의무 즉 효孝가 있고 나라에 바쳐야 할 충忠의 의무가 있고 또 하나 남에게 베풀어야 할 믿을 신信이 있는데 그것이 빠진 것이다. 
 
그밖에도 우리가 버려서는 안 되는 도덕규율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법 이전의 본래적인 계율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헌법전문 서두에 나오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이란 말이다. 이 말은 헌법조문 - 헌법전문이 아니다 - 전체를 망라하는 헌법의 기본정신이다. 그러나 “유구한 역사와 전통” 바로 뒤에 3.1운동이 일어나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하니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의 큰 착오였다. 3.1 운동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었기에 나온 정신의 소산이었다. 그 정신이 무엇인가 하니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교육이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망각하고 남의 정신인 서구문화를 그대로 맹신하고 서구화하는 것이 역사발전의 방향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의 홍익인간 이화세계란 무엇인가.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문화는 9천 년 우리 역사 가운데 단 1500년밖에 안 되는 외래 문화였다. 우리에게는 신교神敎(또는 선도仙道)라는 이름의 시원문화가 있었고 그것이 중국문화와 일본문화를 보듬어 안고 우리 것으로 길러낸 것이다. 지금의 외래문화가 아니다. 그러나 이걸 잊고 우리는 남의 말 즉 공자와 석가모니 그리고 노자와 예수의 말을 믿고 따르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석학 최치원 선생은 우리 문화를 일명 풍류도風流道라 한다 하면서 외래삼교를 모두 아우른 우리 문화라 하였고 원광법사는 일명 선도仙道 또는 현묘지도玄妙之道라 한다 하면서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우리 고유문화의 핵심이라 하였다.  
 
이렇게 귀중한 구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난다.” 는 말의 뜻을 모르고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밖에 모르는 북한은 두말할 것 없이 주체사상이 없다. 
 
세속오계란 임전무퇴와 살생유택 그리고 그것보다 더 지켜야 할 계율로 충⦁효⦁신이 들어있다. 이걸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요 이것을 무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이들 계율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이 의무를 지킬 때에 한해서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의무를 지키지 않고 권리만 주장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을 통해 우리가 최근에 배운 외래 서양문화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였다. 4.19혁명은 그동안 우리 대한민국이 해낸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자화자찬하면서 인사와 예절이 바른 우리 한국인을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로 만들었다. 어른을 모르고 남을 모르고 자기만 알고 아니 자기까지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을 마르크스까지도 자기소외自己疏外라고 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무란 권리의 파생물이라 하면서 의무를 무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것이지 가족과 무관하다고 가르쳤다. 즉 개인은 가족 없이도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 로크는 부모와 아들은 서로 친해야 하고 존중해야 하지만 아들이 혼자서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이 같은 사고를 한층 강화시켜 준 것이 서양문화 속 깊이 숨은 유태교와 기독교이었다. 
 
신은 전능하시고 초월적이어서 신의 말씀은 지상의 어떤 다른 지존보다 더 무겁고 중요하다. 부모는 물론 임금님까지도 신의 요구를 거역할 수 없다. 서양의 근대문화는 문예부흥 종교개혁 개화사상 시민혁명으로 탄생한 것이며 그것을 거역하는 나라의 문화는 모두 이단이다. 그중에서도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성당의 대문짝에다가 『95개조』를 못 박음으로서 모든 개인은 신과 직접 관계를 맺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아무리 가족이나 국가 그리고 세속적인 지배자들이라 하더라도 신과 인간 사이에 개입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에 의하면 권리나 법보다 윤리가 더 중요하며 의무가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즉 천지에서 우러나와 인간에게 부과되는 것이라 하였다. 
 
우리 부모들은 “남의 말을 믿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부모 말을 듣지 않고 남의 말을 믿어 속고 있다. 서구문명의 노예가 되지 말라. 단재 신채호의 말이지만 지금 우리는 서구문명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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