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일으켜 돌연 우리나라를 침략한 자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었다. 그러나 그의 본명은 평수길平秀吉이었으니 절대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풍신수길이라 부르지 않았다. 전국시대의 혼란을 틈타서 일약 관백關白이란 자리를 차지한 그는 평시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 자의 소행이 후일 정한론征韓論이 되고 일제침략이 되어 우리를 괴롭혔다. 그가 하인 시절에는 상전(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이 “원숭이야! 원숭이야! 이리 오노라.” 라고 놀리었다. 그런 열등감 때문에 평수길은 엄청난 괴물로 둔갑하여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괴물에게 성웅 이순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수길은 조선 정벌을 중국정벌이라 속이면서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칠 터이니 길을 빌리자” 는 거짓말로 명분을 삼았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일본군국주의가 되고 아베의 반한정책으로 재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평수길이 조선정벌을 구상한 것이 언제인가? 임진왜란 6년 전인 1586년 5월 4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날 일본 오사카大阪항구에 한 척의 낯선 포르투갈 양선洋船이 닻을 내렸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은 30명의 천주교 예수회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곧바로 오사카성大阪城으로 가서 수길에게 천주교의 포교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수길은 “지금 나는 조선과 중국을 정벌할 계획인데 당신들이 타고 온 배와 똑같은 배 두 척을 나에게 판다면 천주교는 물론 돈도 달라는 대로 주겠소.”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뒤 신부들이 수길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자 전국에 천주교의 포교를 금지함과 동시에 나무와 쇠를 징발한다는 영을 내렸다. 나무는 배를 만들고 쇠는 조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료였다. 나무는 신사神社에 우거진 신단수神檀樹를 벌채하여 국민의 원성을 샀고 쇠는 절의 불상을 녹여 조총을 만들었으니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한 사람도 입에 반대한다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수길은 무자비하여 반대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했다. 수길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다. 그러니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는 손자병법을 몰랐다. 

그는 또 수군을 무시하여 육군만 이기면 목적을 달성한다고 믿었다. 1592년 4월 13일 새벽 16만의 침략군을 부산에 상륙시켜 파죽지세로 북진하니 불과 20여 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수길은 참전하지 않고 바다 건너 나고야明護屋에서 현지에서 보내는 보고만 받고 일본이 이기고 있다고 믿었다. 마치 하와이의 진주만을 폭격하여 전쟁에 이겼다고 믿었던 일왕 소화昭和와 같은 꼴이었다. 수길뿐만 아니라 모든 무사(武士 = 사무라이)들은 허리에 칼만 찾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모든 문서는 중이 대필하고 읽어주었다. 

그러니 수길은 전쟁 초기의 승전소식이 몇 개월 못가서 패전으로 바뀐 것을 몰랐다. 육전에서는 우익장인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함경도로 진출하여 두만강까지 건넜으나 과속으로 인해 후퇴하였고 좌익장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은 평양에 있는 또 하나의 부산釜山에서 더 올라가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수길이 받아 본 보고서에는 그런 사실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수군을 맡은 구귀가융九鬼嘉隆의 보고를 듣고 이순신의 조선수군에게 패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본 수군의 병력은 불과 1만 명 정도였고 수군에게 필요한 별도 병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적과 싸워 불리하면 육지로 올라가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니 일본수군은 무작전無作戰이었다. 거기다 더 중요한 것은 나무에다 쇠못을 박아 만든다는 조선기술이었다. 일본 배는 못을 많이 박아야 배가 튼튼했다. 그러나 조선의 대맹선大猛船이나 거북선은 나무와 나무를 엮어서 만들기 때문에 가볍고 부닥쳐도 침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배에는 대포를 설치할 수 없고 조총으로 적을 물리칠 수밖에 없는 배였다. 겉으로는 3충 배에 요란하게 장막을 치고 깃발을 내어 걸어 화려하였지만 부닥치면 침몰하는 허약한 배였다. 그래서 우리 수군은 적선에 꽝하고 부딪치기만 하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을 당파撞破라 하였다. 우리 배는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한옥을 보면 우리 목수들의 건축기술이 일본과 다르고 우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다 더 해서 고려 때부터 우리 수군에는 대포의 제작에 큰 노하우가 있었다. 사정거리가 무려 600미터인데다가 포탄이 날아가 적선에 맞으면 폭발하여 사람도 죽고 배도 박살났다. 그러나 수길은 조선에 이렇게 무서운 대포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육전에서는 왜군이 조총으로 아군을 위협하였으나 조총의 사정거리는 불과 10발자국밖에 안 되었다. 그러니 해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대신 우리 수군의 대포는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이런 상태에서 수길은 4년이란 긴 휴전기간을 이용하여 새로운 배, 일본환日本丸을 제작하게 되었다. 일본 기슈紀州라는 곳인데 필자가 한 번 가본 곳이다. 파도가 세어 웬만한 배로써는 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의 영주에게 일본환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일본환의 위용을 보고 자신을 얻은 수길은 1597년의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다. 정유재란은 우리에게 임진년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힌 전쟁이었다. 수길은 더 이상 부하들의 보고문을 믿을 수 없다 하여 조선군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내라고 하였다. 그 실제 보고서를 보고 필자도 놀랐다. 일본 육군은 진주와 남원 그리고 전주까지 점령하여 영호남을 모두 장악하였다. “호남 없이 나라 없다”고 하던 그 호남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만일 이순신이 명량과 노량진의 두 해전에서 졌더라면 우리나라는 이미 그 때 일본의 속국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명량대첩이 얼마나 귀중한 승리인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필승 정신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수군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순신은 이미 옥포해전에서 부상을 당하여 상이용사였다. 그러나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장병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이란 유명한 말을 하면서 도망하면 죽는다고 소리쳤다. 이순신의 운명은 330미터 울돌목 명량해협에 달려 있었다. 적이 아무리 배가 많아도 좁은 해협에서는 일렬종대로 행진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더해서 하루에 한 번 반드시 간만조干滿潮가 있어 물이 반대로 흐른다.

이순신은 이것을 노렸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더니 “너는 명량 어구에서 적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적을 치라. 적군은 330척이 넘는 대 함대니 12척의 배로 이기기 어렵다. 한산도에서 적을 무찌른 학의 날개 진법鶴翼陣(학이 날개를 펴듯이 진을 치고 적을 포위하는 진법)을 잊지 마라.” 하였다.  과연 적은 일본환日本丸을 앞세워 일렬종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새벽에 바닷물은 평온했다. 그러니 점심때가 되니 바닷물은 요동을 치고 적선을 집어삼켰다. 이 광경을 영화에서 본 관객들은 모두가 소리를 지르면서 흥분하였다. 

이 장면을 보기 위해 1,700만이 넘는 관객이 영화관에 몰렸다니 우리 국민이 지금 누군가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 이순신이 다시 나타나야 한다. 오늘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하늘이여! 우리에게 명량대첩의 기적이 일어나게 해 주소서.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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