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일어나서 TV 뉴스를 틀어 보면 웬 사건사고가 그리도 많고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을 많은지 모른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현상이다. 아무리 세계화가 좋다 해도 사람이 나빠지고 있다. 인간성이 사악해지고 있다면 큰일이다. 인간성이란 영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면 사악해지기도 하고 선화 즉 착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문화는 인류 공통이라 하지만 문명은 다르다. 문명에 양성이 있고 음성이 있다. 볼록 형이 있고 오목 형이 있다. 서양문명이 있고 동양문명이 있어 문명 여하에 따라 인간성이 달라진다. 서양문명은 사막에서 살던 유목민이 오로지 한 하느님만을 믿는 일신교 신자들의 후손이라 호전적이요 겁 없이 살생을 일삼는다. 인간성을 문명론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 한국인은 당연히 서구문명에서 제외되어 착한 동양문명인으로 치부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서울 한 곳에 회교사원이 있어 저런 낯선 곳에 다니는 한국인이 있는가 의아해 하지만 그 정도로 우리는 중동의 회교신앙을 잘 모르고 지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의 외신보도를 보면 IS 즉 이슬람국가란 테러 단체가 생겨 사람을 막 죽인다고 하는데 젊은이들이 자원입대한다는 것이다. 그 여파가 우리에게도 미쳐 최근 10대 한국 젊은이 김 모 군이 “IS에 가담한 것이 아닌가.” 하여 연일 보도되고 있다.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중동전쟁이 마침내 우리나라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때를 같이 하여 IS가 일본인 두 명을 붙들어 공개 처형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고 하니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었다. 얼마 전 한국인 목사가 엄청난 돈을 내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중동전쟁은 멀고 먼 서구 중세 말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독교 국가들이 성지탈환의 구호를 내걸고 십지군 전쟁을 벌인 사건이 오늘의 중동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200년간이나 계속되어 수많은 서양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너 중동에까지 가서 죽었다. 전후 여덟 차례나 원정하여 많은 젊은이가 죽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 말기에는 소년십자군(1212)이 조직되어 어른 대신 소년들이 중동에 가서 죽었다. 모두가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을 걸고 싸운 전쟁이었으나 모든 배후에 못된 인간들이 숨어서 공작한 결과였다. 요즘의 이슬람을 위해 중동으로 자원입대하는 사태를 보고 필자는 소년십자군의 비극을 생각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을 착하게만 보아 온 서양의 인간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개탄하고 있다. 아니 필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학자가 이제 와서야 인간성을 잘못 본 사실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왜 전쟁터에 가서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죽어야 하는가. 자폭이란 자살을 말한다. 자폭은 자살보다 더한 죄악이다. 자살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다는 점에서 자폭과 같으나 자살은 자기 때문에 죽지만 자폭은 자기와 무관한 남을 위해 죽는 것이다. 거기다 더한 것은 자폭으로 인해 죽는 피해자가 억울하건 말건 상관없이 같이 죽자는 것이니 안중근 의사의 죽음과 요즘의 IS식 자폭행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죽인 뒤 탄알이 남았는데도 쓰지 않았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살생유택(殺生有擇)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전쟁이나 테러는 상대가 누구인가를 가리지 않고 죽인다. 왜 이렇게 인간은 사악해졌는가. 최소한의 양심이 없어진 것이다.

보육원에서 아동을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가 이전에 갖고 있던 따스하고 부드러운 인간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진작 우리는 인간성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재고했어야 했다. 일제가 미국을 상대로 전쟁했을 때 특공대를 조직하여 미군 함정을 자폭 공격했다. 일본군이 자폭공격을 한 일인용 어뢰정을 보면 정말 인간을 이렇게 짐승 다루듯 해서 되는가 했지만 지금의 일본인들은 언제 우리가 그랬던가 하면서 사람들에게 자폭어뢰정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구 일본군의 애국심이라 공언하고 있다. 우리도 특공대란 말을 일상생활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해왔다. 우리는 밭에서 일하다가 저 멀리 남태평양 섬으로까지 붙들려가서 강제 연행되어 가서 땅 굴속에 갇혀서 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이런 비참한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비참한 유산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동안 인간성을 너무 안일하게 해석한 탓에 역사를 잘못 해석하고 오늘의 현실을 오판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전제하고 존경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 인간도 여름날의 하루살이가 불 속에 뛰어들어가 죽듯이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자기 아내와 그 자식을 죽이고도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살인범 얼굴을 보고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무서운 악마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인간은 기껏 그 알량한 집과 재산을 가지고 평생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물질생활만 충족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갈 것이라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만일 그 정도의 욕망충족으로 일생을 마치는 존재라면 인간을 잘못 본 것이다. 인간의 가슴속에는 겉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무엇이 들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덩어리 같은 것이다. 뜨겁고 뜨거운 불덩어리인데 누구나 그것을 품고 있다. 그것을 <기>氣라 한다.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절대 손찌검을 하지 말라”, “가르치되 아이의 <기>를 죽이지 말라”

고 했다. 그런데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지옥 같은 보육원에 맡겨 주먹질을 당해가면서 자라게 되면 그 아이의 <기>는 무엇이 되는가. 기가 죽어서 없어지거나 비틀어지는 것이다. <기>를 에너지(Energy)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그냥 에너지라고 한다면 자원資源이 된다. 기는 자원이 아니라 자원으로 생기는 동력 바로 그것이다. 인간을 우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살아있어야 인간이란 뜻이다. 아니 죽어서도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사가 분명치 않다. 우리는 죽는 것을 돌아가셨다고 한다. 언젠가는 돌아오신다는 뜻이다. <기>는 생명의 원동력이다. 아니 에너지의 에너지다. 어떤 학자는 기를 우월원망優越願望과 평등원망平等願望의 둘로 구분하여 누구나 남보다 우월하다는 의식 아닌 원망을 하고 있고 또 하나 나는 남보다 못하지 않다는 평등원망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보통사람을 보통사람이 아닌 니체의 초인超人, 즉 슈퍼맨으로 만드는 것이라 했다.

나는 초인이다. 아니 초인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남보다 못하지 않다는 우월욕망이 있다. 그것이 위로는 대통령이 되고 싶게 하고 이순신이 되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모르고 인간을 알았다고 할 수 없다. 원숭이를 알았다고 할 수 있어도 인간은 모르는 것이다. 요번 아시안 축구경기에서 자신의 초인적 능력을 과시한 차두리 같은 뛰어난 축구 선수가 그동안 모르고 지냈다. 만일 독일인 감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차두리는 아버지 차범근의 빛에 가려 일생을 허송할 뻔했다. 시리아의 이슬람국에 달아난 김 모 군도 <기>가 쌘 젊은이다. <기>에는 선악이 없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기>를 쓰고 안 쓰는 데 따라 알게 되기도 하고 모르고 사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기를 일명 <기개>氣槪라고도 하는데 과학자들은 이 기개를 일종의 물질로 잘 못 보고 왔다. 그러나 그것은 유무有無를 알 수 없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었다. 그것은 하늘과 땅 위에 가득 찬 <기>다. 우리들 인문학자의 눈에는 <기>가 보인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다. 정신은 이 지구 상에 처음 불덩어리가 되어 나타났다가 35억 년 전 싸느라 게 식어서 바위가 된 단군바위가 되기도 했다. 인간은 바위를 숭배하다가 신단수를 숭배하게 되었고 그 다음에 환인 환웅 단군 즉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단군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로 자리를 옮겼다. 불교에서는 하늘을 <공>空이라고 하였고 텅 빈 <허>虛로 보았는데 <공>이나 <허>나 모두 비어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도에서는 기를 인간은 물론 우주에 충만해 있다고 해석했다. 기가 모이면 기백이 되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말은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 하면 산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 된다. 

『천부경(天符經)』제일 앞에 일시무시一始無始 일석삼국一析三極 무진본無盡本이라고 하였다.

일이 시작이지만 무가 시작이다. 일을 나누면 삼이 되지만 아무리 닳고 닳아도 본本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부경』의 일시무시를 이렇게 해석하여야 제대로 해석했다고 보는데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는 식의 서구식 인식론을 가지고는 바른 해석이 안 나온다. 사악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인간성은 서구문명의 부산물이다. 역사는 그대로 두고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다)하기만 하여도 안 된다. 인간의 <본>은 선악을 초월한 <기>다. 기가 한 번 악이 되면 1만 개의 원자탄도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동력으로 변한다. 역사의 원동력인 인간성은 지금 멸망 직전에 있다. 학자들은 그것을 덮어 버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탄 열차가 탈선하여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다. 지금 급제동을 걸어 열차를 멈추게 할 방도가 없을까. 있다.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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