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통일되었는데 우리 한국은 왜 통일되지 않는가. 미국과 소련이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는 이유로  6.25가 흐지부지 끝난다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맥아더가 압록강 다리를 완전히 끊어버리고자 결심했으나 트루먼이 반대하여 압록강 철교는 지금도 반 토막이다. 유명한 유행가 신라의 달밤과 흥남부두의 두 노래가 통일이 무산된 그 때 그 노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흥남부두의 수송선에 올라 탄 10만 명이나 되는 함경남도 피난민들이 들으면 눈물이 나겠지만 그 배후에는 역사관을 달리한 맥아더와 트루먼이 숨어 있는 것이다. 

6월은 6.25의 달이다. 6.25가 일어난 지 올해로 65년이나 된다. 그러나 6.25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여러 가지다. 6.25 전쟁은 불과 3년 만에 끝났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중간한 휴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6.25는 왜 그렇게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어중간하게 만들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만일 6.25가 우리의 군사적 승리로 끝났더라면 우리는 벌써 남북대결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했을 것이다. 절대 오늘과 같은 불안한 국제정세를 연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남북의 분단 그 자체보다 6.25가 남북의 대결을 종식하는 기회가 되지 못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늘 6월이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6.25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중병(重病)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올해는 광복 70년이자 6.25전쟁이 65년이 되는 해다. 무엇인가 변화가 있을 법도 한 그런 해다. 아니 꼭 변화가 있어야 한다. 외국에서는 6.25를 한국전쟁이라 한다. 이름이 다르면 그 뜻도 다르다. 6.25를 가장 불쾌한 전쟁으로 여긴 나라는 의외로 미국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불쾌한 전쟁(little sour war)으로 기억해 왔다. 지금도 별로 유쾌한 전쟁으로 여기는 것 같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으로서는 한국전쟁과 같은 작은 전쟁을 당연히 승리로 끝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을 유쾌하게 생각할 리 만무하다. 최근 모스크바에서 러시아가 승전 70주년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를 버젓이 크렘린 광장에서 벌인 푸틴이 이제는 미국의 단극(端極) 시대가 끝나고 다극시대가 왔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가고 러시아와 서유럽 그리고 중국이 세계를 공치(共治)하는 다극(多極)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이에 덩달아 일본이 날뛰게 되었으니 세상이 100년 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니 다시 새로운 유사품 제국주의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65년 전의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으나 실은 그 배후에 소련, 지금의 러시아가 북한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이 최근 명백히 드러났다. 북한이 남침을 시작하자  미국은 즉각 유엔군을 동원하여 낙동강까지 내려 온 북한군을 막아냈다. 도시로 말하면 부산과 대구가 겨우 살아남았을 뿐 다른 모든 지역이 공산주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그런 것을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간 것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웬 일인지 유엔군은 갑작스레 후퇴하기 시작했다. 북에서 남으로 넘어 한강 이남으로까지 후퇴하였다. 중국이 전쟁에 개입함으로서 정세가 역전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시작하자마자 미국은 국제연합(UN)의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는데 이것은 트루먼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의 인생관은 “먼저 행동하고 뒤에 생각하라” 우물쭈물 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트루먼의 그런 기질이 없었다면 이미 낙동강까지 내려 온 북한군을 절대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며 푸틴의 전임자 스탈린을 후회하게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말년에 자기가 크게 오판하였다고 생각하면서 죽었다. 설마 트루먼이 그렇게 재빠르게 반격에 나설 줄 몰랐던 것이다.

만일 루즈벨트가 살아있었더라면 트루먼처럼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트루먼의 결단 덕분에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니 트루먼의 결단으로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트루먼보다 더 고마운 사람은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한 맥아더 장군이었다. 군사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이 작전의 성공률은 5000분의 1이었다고 한다. 5분의 1이라 해도 위태위태한데 5000분의 1이라니 불가능하다는 분석이었다. 그런 불가능을 도전하여 성공한 장군이 맥아더였다. 따라서 이 작전이야 말로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승전이었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서울을 점령한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놀란 것은 트루먼이었다.

즉시 트루먼은 유엔군을 38선 이남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하였다. 여기서 맥아더와 트루먼 사이에는 의견대립이 생긴 것이다.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반드시 적의 후방을 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중국 땅을 맹폭하여서라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트루먼은 만일 미국이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한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면 전쟁은 장기화 되는 것이다.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정보도 있으니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만일 맥아더의 소신대로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여 중공군의 진입로를 막았더라면 한국전쟁의 승패가 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한반도는 통일되고 우리는 더 이상 남북분단의 고통에서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애초부터 세계대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맥아더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미국이 이기는 전쟁으로 끝내야 한다고 믿었고 트루먼은 전면전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승패에 구애되지 말고 무승부로 끝내려 한 것이다. 맥아더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승패를 중시하였고 트루먼은 정치가였기 때문에 평화를 중시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아시아를 세계정복의 도박장으로 선택하였다. 그 결전장은 바로 한반도 남쪽의 낙동강유역이다. 우리는 이미 공산침략군과 싸우고 있다. 아시아의 일각에서 우리가 무기를 들고 싸우고 있을 때 유럽에서는 말로만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게 되었다고 떠들어댔다. 만일 우리가 이번 한국전쟁에서 진다면 아시아는 물론 유럽은 모두 적화되고 말 것이며 만일 우리가 이긴다면 세계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순간 운명의 시계 바늘이 똑딱 똑딱 소리 내는 것을 들었다.”

이 말은 트루먼의 말이 아니라 맥아더의 말이었다. “만일 한국전쟁에서 우리가 이긴다면 세계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한국을 생각해서 전쟁에 이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을 처음부터 국지전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계대전의 일각으로 생각하였다. 맥아더는 북한군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수원에 도착, 지프로 직접 영등포까지 와서 망원경으로 한강 건너 서울거리를 바라보고 명령하기를  “한강다리를 끊어버려!” 라고 명령하였다.

만일 트루먼이 맥아더와 같이 한강을 건너와서 소련제 탱크의 경음소리를 들었다면 소련과의 전면전을 각오하고 필승의 결의를 다짐하였을지 모른다. 한국전쟁을 눈으로 확인한 사람과 멀리 미국에서 세계 평화를 생각한 트루먼과는 서로 시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었고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맥아더의 동상은 지금도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인천공원 언덕 위에서 서해바다를 내려다보고 서있다. “내가 아니었으면 한국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까지도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 맥아더 동상은 지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말대로 압록강 철교를 폭격하여 중공군의 숨통을 끊었더라면 한국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맥아더의 체면을 생각해서 트루먼은 압록강 철교의 중심부 이남만 공격하고 철교의 북쪽부분은 중국영토에 속하니 절대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미 공군으로서는 안개 속에 잘 보이지도 않는 철교 중심부를 찾아내어 성공리에 반 토막을 내는데 성공하였다. 지금도 중국 단동(丹東)에 가서 끊어진 압록강 철교를 보면 절반만 남아 있고 북한쪽 다리 부분은 끊어져 물속에 가라 앉아 있다. 만일 실패했더라면 한국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을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지금 미국은 일본을 또 다시 앞세워 러시아와 중국의 대륙 세력을 막으려 하고 있다. 미국 정책입안자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국전쟁 당시의 정세판단을 그대로 본 따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맥아더와 트루먼의 생각이 들어 있다. 100년 전 영국과 미국은 군국주의 일본을 이용하여 일본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나서라고 독촉했다. 그 덕으로 일본은 미국이 시키는 대로 대한제국을 강점하였으나 미국의 의사와는 달리 만주와 중국 그리고 동남아까지 먹으려 들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개와 다시 싸워야했다. 지금 미국은 또다시 일본이라는 이름의 개를 이용하여 다자주의시대의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다.

우리가 볼 때 미국의 구태의연한 실패의 재연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좀 더 역사를 공부하여 대외정책에 충실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미국이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도와준다면 그 결과는 뻔 한 것이며 우리는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미군과 일본군이 함께 들어와 서울 용산기지에 주둔하게 된다. 일제는 50년간 가점한 용산기지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일본군이 다시 들어 와 주둔하고 한국을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아베 할아버지는 최후의 조선총독이었고 일제의 패망으로 한국을 떠나면서 50년 안에 한국을 다시 지배할 것이라 말했다.

키신저는 20세기 미국의 대외정책을 주도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런 인물이 증언하기를 “20세기의 미국은 전쟁에 100% 이겼으나 외교에는 50% 지고 50%밖에 이기지 못했다”고 했다. 미국은 지금 외교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 잘 못하고 있느냐 하면 바로 1950년 한국전쟁 때부터 실수하고 있는데 70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실수를 하려 하고 있다.

최근 서울에서 개최된 한 국제 학술회의(중앙일보 CSIS연례포럼 2015년-아시아 패러독스 50년)에서도 역사를 모르는 사회과학자들이 한결같이 “한국은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두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아까운 돈을 들여 그런 국제회의를 하려거든 차라리 그 돈을 네팔에 보내 이재민을 도와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지금 미국의 위정자들은 한국전쟁의 실패를 잊어버리고 이긴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모르는 정치학자들도 똑같이 흐지부지 끝낸 한국전쟁의 실패를 모르고 이긴 전쟁으로 알고 있다. 얼빠진 북한도 6.25 정전협정일을 승전기념일로 둔갑시켜 나팔을 불고 춤을 추고 있다. 차라리 미국은 중국과 손을 잡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일본이 한 손에 국화를 들고 다른 한 손에 칼을 들어 남을 해치는 나라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