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원장 김홍준)이 1980년대 한국영화의 정책·산업적 환경과 작품·영화인 등을 개괄하여 《1980년대 한국영화: ‘서울의 봄’부터 코리안 뉴웨이까지》(정성일·이효인·정종화·허남웅·김영진·김혜선·유운성·공영민·이수연, 앨피, 2024)를 펴냈다. 이 책은 공공 필름 아카이브인 한국영상자료원만의 장점을 발휘하여 전문적이면서도 대중 독자들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획 도서 시리즈의 하나로 발간했다. 2020년 《21세기 한국영화: 웰메이드 영화에서 K-시네마로》, 2022년《1990년대 한국영화: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영화의 모든 것》에 이어 세 번째로 펴낸 것으로 1980년대 한국영화를 다시 보기 위한 책이다. 각 필자의 원고와 아카이브 자료를 소개하는 지면까지 독자들이 마치 입체 퍼즐처럼 1980년대 한국영화의 전체상을 그려 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한국영자료원 엮음 '1980년대 한국영화' 표지. 이미지 정유철 기자
한국영자료원 엮음 '1980년대 한국영화' 표지. 이미지 정유철 기자

1부는 정성일 영화감독 겸 영화평론가와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을 지낸 이효인 경희대 교수의 1980년대 한국사회와 한국 영화에 대한 회고록으로 구성하였다. 정성일 영화감독은 회고에서 ‘서울의 봄’에서 시작한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무렵,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 가옥 나동 2층 연회장에서 김재규 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 그리고 다른 네 명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살해했다. 하나의 시대가 끝났다. 그리고 1980년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80년대 영화를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1980)로 시작한다. 정성일 감독은 <바람불어 좋은날>을 보면서 그때 한국영화의 낙원을 처음 만났다고 했다.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아, 박정희가 죽은 다음의 영화가 도착했구나, 라는 말을 해 버렸다. 이전에는 다룰 수 없던 자리의 이야기, 혹은 의무처럼 다루어야 한다면서 내리누르던 역사의 무게를 밀쳐 내고, 여기서 비록 패배하고 말았지만, 언젠가 도착할,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도착해야 할, 낙원을 기다리면서 눈물을 찍고 있었다. 그때 이 영화는 내일의 영화였다.” 그러나 낙원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이효인 교수는 “1980년대 한국영화계는 역사의 실험실이었다”고 규정한다. 동시에 공통의 척도가 없는 다수적 공간, 즉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였다는 것이다. “1985년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산업의 근저가 변했으며, 과거의 거장들이 퇴장하는 동시에 신인 감독들이 등장하였고, B급 영화의 흥행과 예술영화가 공존하였다. 또 무엇보다 ‘코리안 뉴웨이브’라는 꽃망울이 맺어졌으며, 기존 충무로 영화를 비판하는 청년 영화인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작은, 열린, 민족, 민중, 독립 등의 다양한 형용사를 붙이며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1990년대 영화문화가 전에 없이 풍성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1980년대 영화청년들이 기반을 다졌던 덕분일 것이다.

《1980년대 한국영화》2부 ‘1980년대 한국/영화’는 정책·산업 환경부터 장르와 미학 지형, 배우라는 프리즘, 독립영화계 그리고 영화문화의 변화까지 1980년대 한국영화의 여러 요소가 한국사회라는 콘텍스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총론(정종화), 장르(허남웅), 미학(김영진), 배우(김혜선), 독립영화(유운성), 영화문화(공영민)로 나누어 분야별 1980년 영화계를 조망한다.

이 시기는 “비록 낯 뜨거운 에로영화가 장르적 주류를 이루었지만 외국영화에 맞춰진 대중의 눈길을 돌리고자 영화계가 합심해 여러 장르를 모색했던 시기, 기성의 작가주의 감독들은 자신만의 미학을 굳히기 위해 우회와 나아감을 되풀이했으며,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신진감독들은 우리 영화미학이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1980년대 에로영화가 장르적 주류를 이루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은 “1980년대는 ‘문화’라는 지층이 한국사회의 수면 위로 올라온 시기”라고 본다. “1980년대의 전반기는 유신정권의 영화정책이 고스란히 이어졌지만 자유롭게 영화를 제작하려는 영화인들의 의지와 열망은 더 이상 누를 수 없었고, 이는 당국의 은밀한 입장과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예컨대 그 과정은 섹스에 관한 검열의 완화였고, 결과는 애로티시즘 영화의 범람이었다.”

"유신영화법의 연속성 아래 있었던 전반기 역시 한국영화의 불황 국면을 극복하고자 국가 주도의 제작과 검열이라는 기존 방식에 대한 영화인들의 변화 요청이 끊이질 않았고, 그 요구가 혼란스럽게 조율되고 결국 방향이 결정되는 시간이었다. 하반기는 프로듀서와 감독, 작가, 배우 등 창작자를 중심으로 한 영화인들의 염원이었던 ‘제작자유화’가 실현되어 활기를 찾았지만, 그 이면에는 할리우드 영화 직배라는 미국의 요청을 수용하기 직전에 처한 당국의 사정이 숨어 있다. 이렇게 1980년대 한국영화계는 격동의 시기로 진입한다."

또한 소극장과 비디오 매체의 등장으로 대형 영화관 중심의 영화문화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였다.

《1980년대 한국영화》3부는 영화인 구술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04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기획, 감독, 배우, 촬영, 조명, 편집, 의상, 분장, 소풍 등 영화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영화인들로부터 구술 인터뷰를 진행하여 기록을 남기고 보존하는 사업을 진행해왔다. 지난 20년간 총 227명의 영화인이 남긴 1,230시간의 인터뷰 중 이 책에는 1980년대 한국영화산업에 대해 영화인 30명이 남긴 기록을 활용하였다.

3부를 정리한 한국영상자료원 이수연 연구원은 말미에서 이렇게 적었다.

”1980년대 한국영화를 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아주 강력한 무언가를 상대로 투쟁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건 이 시기에 대한 영화인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영화인들이 그렇게 치열한 감정으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술을 통해, 다시 말해 영화인들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과거를 본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구술에는 신문 기사나 과거 공적인 문서에는 남아 있지 않은 그들의 뜨거운 감정들이 드러나고, 역사적 사실만이 아닌 역사를 실제로 살아냈던 사람들의 면면이 담겨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영화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영화법이 개정되고, 제작이 자유화되고, 미국영화가 들어왔던-이 그저 시간이 지나며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여러 영화인과 단체들의 뜻과 목소리가 담긴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그저 재미없고, 멀게만 느껴졌던 1980년대라는 시기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1980년대 한국영화》는 1980년대를 영화를 매개로 그 시대의 한국 사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새롭게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