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신' 스틸. 이미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배신' 스틸. 이미지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상자료원(원장 김홍준, 이하‘영상자료원’)은 그간 유실된 극영화 16편과 일부 장면 등이 훼손되어 영상자료원이 불완전판으로 보유 중이던 극영화 19편을 완본으로 발굴하였다.

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은 1월 26일 서울 상암동 소재 영상자료원에서 ‘미보유 발굴 필름 공개 및 기관 창립 50주년 기념 언론간담회’를 열고 미보유 발굴 필름을 공개했다.

이번에 수집된 영화들은 연간 100편 이상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에 집중되어 있다. 멜로드라마, 사극, 반공물, 액션물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포함하여 ‘첫번째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영상자료원은 2023년 5편의 작품[<배신>(정진우, 1964), <어머니의 힘>(안현철, 1960), <서울로 가는 길>(이병일, 1962), <목메어 불러봐도>(김기, 1968), <석녀(石女)>(김수용, 1969)]를 디지털화하였으며, 오는 6월 상암동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발굴복원전”을 통해 일반에 처음 공개할 예정이다.

김 원장은 “이 영화들은 극/비극영화 수집을 위한 조사 과정에서 발굴했다” 밝혔다.

영상자료원이 2022년 필름 전용 보존고가 아닌 일반적 환경에서의 필름 보존 연한이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아날로그 필름수집 중단기 계획을 수립하여 극/비극영화의 수집을 위한 조사를 하던 중 1980년대 이전 촬영 및 방영된 필름을 방송국에서 보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개국 시점이 가장 빠른 KBS(한국방송, 1961년 12월 31일 개국)와 KTV(한국정책방송원, 1948년 창립된 국립영화제작소의 후신)에서 보존 중인 다량의 8mm와 16mm 필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KBS에서 88편의 16mm 극영화 방영본 필름을 발굴하였다. 

영화 '서울로 가는 길' 스틸. 이미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서울로 가는 길' 스틸. 이미지 한국영상자료원

영상자료원은 필름의 정밀 실사(상태 점검 및 결과여부 확인 등)와 카탈로깅(목록화) 작업을 통해 미보유 한국영화 16편과 불완전 보유 한국영화 19편을 확인하였으며, 2027년까지 88편을 모두 디지털화하여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에 대거 발굴된 영화들 역시 멜로적 성격이 강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사극, 반공물, 액션물, 문예물 등 1960년대 당시 장르를 개척해 나갔던 정진우, 김수용, 임권택, 장일호 감독 작품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감독들은 196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젊은 감독들로 이번에 발굴된 작품들은 이들 감독의 초기작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어 한국영화의 장르 형성이나 거장 감독의 연출론 형성 과정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원효대사>(장일호, 1962), <세종대왕>(안현철, 1964), <태조 이성계>(최인현, 1965) 등의 대작사극은 당대 영화제작 규모를 예측할 수 있는 작품이자 현재까지도 반복적으로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는 소재로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점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주요한 작품들이다. <비나리는 선창가>(임권택, 1970)는 한국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 <장군의 아들>(임권택, 1990)로 나아가는 ‘액션영화 문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서울로 가는 길>(이병일, 1962), <두고온 산하>(이강천, 1962), <전장과 여교사>(임권택, 1965), <절망은 없다>(전조명, 1968) 등의 일련의 한국전쟁 배경의 반공물들은 ‘전쟁’에서 ‘분단’으로 변화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는 작품들로 한국 사회의 정서적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읽어낼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배신>(정진우, 1964), <서울이여 안녕>(장일호, 1968) 등의 멜로드라마 역시 영화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당대 한국사회 내부를 반영하고 있다.

영화 '석녀' 스틸. 이미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석녀' 스틸. 이미지 한국영상자료원

이번에 발굴된 미보유 영화는 1960년대 12편, 1970년대 4편으로 극영화 보유율 증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한국고전영화를 발굴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는 희망적인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기보유작인 72편도 상영본이 아닌 TV 방영본 발굴을 통해 두 판본의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매체환경에 따른 검열과 편집 등 한국의 미디어라는 큰 틀 속에서 영화의 위치를 재논의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 첫 번째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로 한국영화의 양적 질적 성장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때였다. 영상자료원의 미보유작 16편 중 디지털화를 통해 선공개하는 5편은 1960년대 가장 많이 제작되었던 멜로드라마 장르 중에서 시대적 흐름과 조우하며 당대의 변화양상을 뚜렷하게 반영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선정하였다.

<배신>(정진우, 1964)은 1963년 24세의 나이로 감독으로 데뷔하여 “흥행 가도를 달리던 신예” 정진우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사랑의 비극성과 낭만화라는 정진우식 멜로드라마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이날 영화 <배신>을 연출한 정진우 감독이 언론간담회에 참석하여 시나리오, 촬영 방식, 배우들의 일화, 우여곡절 끝에 아카데미극장을 상영관으로 잡아 상영하여 첫회부터 매진될 만큼 흥행에 성공한 이야기 등을 들려주기도 했다. 

또한, 동시기 개봉한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과 함께 1960년대 중후반 ‘청춘의 사랑과 죽음’이라는 멜로드라마의 테마를 이끌었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어머니의 힘>(안현철, 1960)은 일제강점기 동양극장 흥행작인 동명의 신파멜로드라마를 영화화한 것으로, 아이가 그리워도 찾아가지 못하는 어머니의 애끓는 정서는 한국전쟁 이후 분단이 고착화되어 가는 시점에서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이산(離散)의 심정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목메어 불러봐도>(김기, 1968)는 한국일보 연극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이재현의 희곡 <해뜨는 섬>을 영화화한 멜로드라마이다. 같은 멜로드라마라도 정부의 규제와 통제가 점점 강화되어 가는 1960년대 말에는 그 표현 양상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멜로드라마의 거장’ 김기 감독은 ‘해뜨는 섬’이라는 이상향에 대한 염원, 그리고 이상향에 대한 실현을 가로막는 세상의 힘에 대한 자각이라는 비극성을 작품 속에서 강하게 드러냈다. <석녀(石女)>(김수용, 1969)는 대표적인 문예영화 감독인 김수용이 정연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번에 발굴된 TV방영본은 흑백이지만, 개봉 당시에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불륜 멜로드라마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남성의 욕망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희생당하기만 하는 여성이 아니라 남편의 외도와 바탕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정을 떠나 새로운 선택을 하는 여성을 그림으로써 당시의 스테레오타입 여성 재현에 변화를 꾀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반공물 <서울로 가는 길>(이병일, 1962)은 서울중앙방송국(HLKA)에서 방송된 김동현 원작의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국방부의 허가를 받아 38선 인근에서 촬영하였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본격 전투 장면보다는 전쟁 포로와 탈출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당대 비판도 받았지만 <시집가는 날>(1956)과 <자유결혼>(1958)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데 능숙함을 선보였던 이병일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탈출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인간 본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영상자료원은 KBS에서 발굴하여 디지털화한 5편 이외에도 2023년 한해에만 한국고전영화 62편을 복원하여 디지털화하는 등 지속적으로 디지털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 필름의 물리적 훼손이 진행되고 있어 디지털 복원이 시급한 영화들은 여전히 산재해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디지털 복원 대상작만 795편이며 이 중에서 훼손 진행도가 높아 시급한 복원대상작은 48편이다. 현재 속도로 디지털 복원을 진행한다면 약 20년이 소요되는 양으로 한국고전영화에 복원 및 디지털화에 관한 관심과 예산의 증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