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방정환 선생이 서거한 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운동가로 활약한 소파(小波) 방정환 선생. 특히 소년운동을 주도해 ‘어린이’ 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고 최초의 어린이날을 만든 주인공이다. 올해로 어린이날 제정 100주년을 맞이 했다.

방정환 선생. [사진 국가보훈처]
방정환 선생. [사진 국가보훈처]

소파 방정환 선생은 1899년 서울 출신으로 1913 년 선린상업학교에 재학 중 천도교에 입교했으며, 1917년 권병덕의 소개로 천도교주인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했다. 1918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청소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20년 「어린이 노래」를 번역해 소개하면서 ‘늙은이’, ‘젊은이’ 용어와 대등한 의미로 ‘어린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천도교청년회 회원으로 만 세운동 준비에 협력하고 동료 오일철과 함께 자택 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해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1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를 조직했으나 1921년 11월 10일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됐다.

1923년 소년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국내 최초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 서울 시내 소년단체들의 연합조직인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 이날’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등 소년운동을 주도했다. 『어린이』는 1925년 신년호가 발간 7일만에 매진되어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3판까지 발행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어린이날 제정과 함께 소년운동을 주도한 방정 환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가중된 탄압과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이 가져온 스트레스로 쓰러졌다. 1931년 7월 17일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7월 23일에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서울시 망우리공원묘지에 묘소가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 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