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학원(원장 박선후)은 7월 20일 오후 1시 부산일보 10층 소강당에서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선생의 애국애족정신-독립운동의 산실 부산 백산상회”를 주제로 제12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부산국학원은 7월 20일 오후 1시 부산일보 10층 소강당에서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선생의 애국애족정신-독립운동의 산실 부산 백산상회”를 주제로 제12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부산 수영구 국학기공협회 광안3동동호회가 국학기공 시범공연을 했다. [사진=부산국학원]
부산국학원은 7월 20일 오후 1시 부산일보 10층 소강당에서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선생의 애국애족정신-독립운동의 산실 부산 백산상회”를 주제로 제12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부산 수영구 국학기공협회 광안3동동호회가 국학기공 시범공연을 했다. [사진=부산국학원]

(사)국학원이 주최하고 부산국학원이 주관한 이날 학술대회에는 오찬국 국악교육신문 경남지사장 등 각계 인사와 시민 등 150명이 참석했다. 학술대회를 축하하여 문규태 부산시립예술단원이 대금 연주를 하고 부산 수영구 국학기공협회 광안3동동호회가 국학기공 시범공연을 했다.

부산국학원 박선후 원장은 식사에서 “백산 안희제 선생은 그의 호를 따서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중요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그런데 백산 안희제 선생의 독립투쟁을 부산 시민이 잘 알지 못한다.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백산 안희제 선생의 독립투쟁을 부산 시민이 알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강상익 부산국학원 교육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학술대회에서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백산 안희제 선생과 백산상회 독립운동”을 주제로 발표했다. 이어 우대한 국학원학술이사가 “대종교의 수행과 백산 안희제 선생의 사생관”을, 김동환 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백산 안희제 선생과 대종교-조선어학회와 임오교변을 중심으로”를 각각 발표했다. 발표가 모두 끝난 후에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애국애족과 독립투쟁에 관해 종합 토론했다.

부산국학원이 20일 부산일보 10층 소강당에서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선생의 애국애족정신-독립운동의 산신 부산 백산상회”를 주제로 개최한 제12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 발제와 토론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부산국학원]
부산국학원이 20일 부산일보 10층 소강당에서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선생의 애국애족정신-독립운동의 산신 부산 백산상회”를 주제로 개최한 제12회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 발제와 토론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부산국학원]

 

안희제(安熙濟) 선생은 1885년 8월 4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친 안발(安鏺)과 모친 창녕 성씨(成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강진(康津), 호는 백산(白山)이다. 7살 때부터 선생은 향리에서 집안의 형인 안익제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매우 영민하여 문리를 쉽게 터득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하지만 일제가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자, 선생은 “국가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라며 신학문을 익힐 뜻을 집안 어른들에게 밝혔다.

선생은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음에 양정의숙(養正義塾)으로 전학하여 전통 한학의 토대 위에 서양의 선진 학문을 접목하여 갔다. 이때 선생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동량이 될 청소년의 교육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같은 인식 아래 선생은 양정의숙에 재학 중이던 1907년 교남학우회(橋南學友會)를 조직하여 빈궁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보급하고, 동·하기 방학 기간에는 순회강연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벌여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1908년 영남지방의 유지들과 교남교육회(橋南敎育會)를 조직하여 잡지 발행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학교 설립에 필요한 교육재원의 확보에 힘썼다. 그리하여 선생은 1907년에는 동래(東萊) 구포(龜浦)에 구명(龜明)학교와 의령에 의신(宜新)학교를 설립하였고, 1908년에는 자신의 향리인 입산리에 창남(刱南)학교를 설립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한국 강점과 식민지 지배가 점점 노골화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장기 전략의 일환으로 1909년 10월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결성하였다. 선생을 비롯하여 서상일·김동삼 등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들로 조직한 대동청년당은 8·15 해방 때까지도 그 실체가 발각되지 않은 독립운동 비밀결사였다.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한 선생은 외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봄 선생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기지로 자리 잡고 있던 만주로 나와 독립군 단체들을 역방하던 중,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을 결심하였다. 만주에서 국내로 잠입한 선생은 1914년 9월 청진을 거쳐 해로로 부산에 도착했다.

선생은 가산을 정리하여 자금을 마련한 뒤, 동지들을 포섭하여 1914년 말경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였다. 그것은 선생이 겉으로는 상업 활동을 통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고, 비밀리에 국내·외 독립운동세력과의 연락망을 구축하여 각종의 정보와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또 1916년경부터는 서울·대구·안동·원산·봉천 등지에 백산상회의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지역을 확대하였다. 그 가운데 대구 연락사무소는 태궁상회(太弓商會)를 경영하는 서상일, 서울 사무소는 미곡상 이수영, 봉천 연락사무소는 해천상회(海天商會)를 경영하는 이해천이 맡아 독립운동 관련 정보와 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의 국내 거점이 되었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봉기를 촉구하기 위해 상하이 신한청년당이 국내에 파견한 밀사 김순애가 찾은 곳도, 그리고 동경 2·8학생독립운동을 국내에 전파하기 위해 김마리아가 찾은 곳도 백산상회였다. 따라서 백산상회는 해외 독립운동세력의 국내 연락 거점임과 동시에 독립운동 전파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며 3.1운동의 추진과 발발에도 기여하였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선생은 집안의 조카인 안준상을 시켜 고향인 의령의 산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영남의 각지에 배포케 함으로써 만세시위운동의 전파에도 힘썼다. 특히 1919년 11월 선생은 백산상회의 관계자 및 영남 유지들과 더불어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결성하였다.

이와 함께 선생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수시로 전달함으로써 임정의 재정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 선생은 한말 계몽운동의 연계선상에서 언론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으로 활약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1926년 동지들과 함께 인수하여 중외일보로 명의를 변경하여 발행하였다.

이때부터 1931년 6월 종간할 때까지 선생은 중외일보에서 사장, 발행인 겸 편집인 등으로 활동하면서 잦은 압수와 정간처분 등 일제의 언론 탄압에도 불구하고 젊은 기자들과 편집진의 항일 언론투쟁을 지원하였다.

또한 선생은 수시로 만주지역을 여행하면서 독립운동자들과 조국 광복의 방략을 논의하고, 그 실천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2월 선생은 북경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돌아오던 중, 신의주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27일 간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선생은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할 구상을 갖고,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26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 동만주 일대를 답사하였다.

선생은 독립운동의 근거지 개척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국내에서의 사업을 서서히 정리하는 한편, 1931년 10월에는 단군을 신봉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조국 독립에 헌신할 마음가짐을 굳건히 다졌다. 그런 다음 선생은 발해의 고도인 만주 동경성 일대에 토지를 구입하여 1933년 발해농장(渤海農場)을 설립,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발해농장 설립의 목적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주로 이주한 한국 농민들을 정착시켜 자작농으로 육성함으로써 독립투쟁의 인적·물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 선생은 만주 영안현 동경성 일대의 광활한 토지를 구입하여 수로를 개설하고, 여기에 한국 농민 3백여 호를 유치하였다. 이들에게 5개년 연부 상환의 조건으로 토지를 분배하여 경작하게 하여 자작농으로 육성하여 갔다. 또한 이주 농민들과 그들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농장지역에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선생이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아울러 1934년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간부들과 대종교 총본사가 발해농장 지역인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선생은 교무행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였다.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부의 활동으로 점차적으로 교세가 확대되고, 교도들의 항일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독립운동세력으로 발전하여 가자 일제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는 1938년 7월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연합군과 힘겨운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 위협의 무게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일제는 1942년 11월 19일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21명의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하여 대종교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이것이 임오교변이다.

이 날 선생 또한 신병 치료 차 귀향해 있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어 만주 목단강성 경무청으로 이송 수감되었다. 여기에서 선생은 일경으로부터 9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생은 1943년 8월 3일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출감한 지 3시간 만에 목단강성 영제의원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학원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행적을 밝히고 위대한 애국애족 정신을 널리 기리고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