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피카소 미술관에서 보는 피카소
국립피카소 미술관에서 보는 피카소
  • 원암 장영주
  • k-spirit@naver.com
  • 승인 2018.12.12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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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원암 장영주의 유럽화첩기행 11

“어머니는 내 어릴 적부터 늘 너는 커서 교황이 될 거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지금 나는 피카소가 되었습니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한 말이다. 폴 끌레를 만나고 온 피카소에게 기자가 그는 어떤 화가냐고 묻자 “파스칼 보나파르트”라고 선문답처럼 간명하게 답한다. “파스칼처럼 철학적이고 나폴레옹처럼 정력적이다.”라는 뜻이다.

교황, 피카소

함께 입체파를 선도한 브라크를 피카소는 “그는 내 아내이다”라고 평가한다. 피카소가 앙리 루소(1844~1910)의 그림에 칭찬 한마디를 하자, 세관원 출신의 아마추어라고 무시당하던 무명의 루소는 단박에 파리는 물론 세계 화단에서 유명해졌다. “중국 화가들은 왜 프랑스로 유학을 오는지 모르겠다. 중국에 제백석이 있는데.” 피카소의 이 말 한마디 이후 제백석(치바이스, 1863~1957)은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며 작품 한 점이 714억 원에 낙찰되는 세계적인 화가가 된다. 이처럼 피카소라는 존재는 미술계의 교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마치 미술사의 모든 천재 화가가 피카소 안에 녹아 있는 것처럼 그의 화가로서 영향력과 파급력은 무한하다.

프랑스 국립 피카소 미술관에서. [사진=장영주]
프랑스 국립 피카소 미술관에서. [사진=장영주]

스페인 말라가에서 미술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20세가 되자 파리에 진출한다. 몽마르트르에 정착하여 서민과 가족의 삶의 비참함을 저미도록 고독한 푸른색으로 그려냈다.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 시대'라고 한다. 첫 전시회를 치르고 자신의 삶도 희망이 보이자 곡마단의 연작에서 보듯 분홍색 등 따뜻한 색을 쓰기 시작하여 '장미 시대'라고 한다. 곧 마티스, 브라크 같은 화가들과 기욤 아폴리네르, 장 콕도 같은 시인과도 교분을 나눈다. 그는 여덟 살 때 신동이었고 열세 살에 이미 소년 대가였으며 평생을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렸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성으로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이며 혁신적인 작업을 이어 간다. 드로잉, 유화, 판화, 조각, 도자기 등 어떤 장르에서도 최고의 수준에 이른다. 이는 피카소 특유의 학문적 기초실력이라는 탁월한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열다섯 살에 벨라스케스처럼 그릴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80년 동안이나 아이처럼 그릴 수 있었다.” 천진한 동심의 고백이다.

아비뇽과 게르니카

소년기에 이미 사실적 묘사의 대가가 된 피카소는 청색 시대, 장미 시대를 지나면서 점차 새로운 화풍에 눈을 뜬다. 사물을 원추, 원통, 원구로 분류하고 한 화면에 여러 시각을 구사한 세잔에 심취한다. “나의 유일한 스승은 세잔”이라며 형태의 단순화와 시각의 다양화를 꾀한다. 세잔의 분류에 입방체(cube)를 더했다고 하여 큐비즘이라 불리며 그 실마리가 되는 작품이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변형된 사람의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피카소의 친구들도 “드디어 피카소가 미쳤다. 아비뇽의 처녀들 캔버스 뒤에서 목을 맬 것”이라는 괴담이 나돌았다. 해부학을 넘어 인체마저도 재조립하는 입체파가 시작된 것이다. 네오나르도 다빈치가 바로 세우고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온 해부학적 지식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다. 폭력적이고 혁명적이다. 파리 마레 지구의 국립 피카소미술관에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위한 습작들이 전시되어 몸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진지한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는 자유인 피카소는 정치적인 압제와 폭력을 극도로 싫어했다. 조국 스페인의 프랑코 압제에 반기를 들고 독일 나치에 대항하여 공산당원이 되고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1937년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프랑코 군을 지원하는 나치가 폭격하여 주민이 많이 사망한다. 이에 분노한 피카소는 '게르니카'라는 대작을 그려 추모한다. 전쟁터의 잔인하고 비참한 현실이 그 어떤 사실적인 기록물과 전쟁화보다도 더욱더 생생하게 전달되어 온다. 뉴욕의 MOMA 미술관에 소장되었다가 피카소의 유언에 의해 스페인에 양도된다. 예술은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는 국적이 있다는 말이 옳다.

화가와 모델

1985년, 파리 마레 지구에 개관한 국립 피카소미술관에는 그에 관한 수많은 작품들과 자료가 쌓여있다. 그가 사랑했던 일곱 명의 여인과 그 밖의 초상화도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진열되어 있다. 피카소의 모델이자 첫째 부인이었던 올리비에를 비롯하여 마리테레스, 실베트 등 연인이자 모델이자 부인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태어난 명화가 즐비하다. 피카소의 여인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사조가 생겨났다고 한다. 모네의 첫 부인 까미유도 처음에는 모델이었고 르누아르의 작품에도 등장한다. 작품 '키스'로 유명한 구스타프 크림트 역시 모델들과의 염문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처럼 모델과 화가는 공동운명체이자 동업자이다. 때로는 거래 관계를 넘어 생사를 함께하기도 한다.

모딜리아니(1884~1920)의 모델인 잔 에뷔테른은 열네 살의 나이 차이와 부모의 심한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한다. 남편과 아버지가 되었으나 여전히 알코올중독자로 고독하고 가난한 남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36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다음날, 임신 5개월의 부인은 투신 자살한다.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 달라.”는 남편의 유언을 지키려고 한 것일까.

불꽃처럼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 에곤 실레(1890~1918)는 미성년자 성희롱으로 모델로부터 고발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미투 운동(me-too)에 해당된다. 당시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노이질은 24일간 구금된 그를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를 올 정도로 헌신적이었으나 막상 그는 결혼은 다른 여성과 한다. 행복한 신혼의 시간도 잠깐, 부인이 유행성 독감에 걸려 사망한다. 실레는 죽어가는 부인을 그린다. 3일 뒤, 실레도 부인의 뒤를 따라 죽으니 마지막 유작이 된다. 피카소가 죽자 일곱 여자 중에서 두 명의 부인이 자살한다.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사람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살과 앎의 합성어로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정신의 합일체를 뜻한다. 그러니 모델을 볼 때 육체만 봐서도 마음만 봐서도 안 된다. 이것은 바로 동과 서를 넘어 예술을 아우르는 통일장이다. 무릇 화가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조화점이 아니겠는가. 에곤 실레는 미성숙한 소녀의 몸을 통해 자기애, 동성애, 금지된 사랑 등 성적 메타포가 가득한 작업을 했고 당시 이런 행위는 부도덕하다는 오해를 받는다. 감옥에 갇히고 작품이 불태워지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 순간에도 수고하고 있을 세상의 모든 모델들께 동업자인 화가의 한사람으로 가슴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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