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32년 만의 폭설로 제주공항의 활주로가 폐쇄됐습니다. 관광객은 공항에 발이 묶였고 노숙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편의점 식료품이 바닥나는 등 사람들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25일부터 항공사들이 임시편을 투입하면서 이들은 육지로 돌아갔습니다. 천재지변으로 발생한 ‘제주공항 대란’은 5일 만에 마무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관광객을 도와준 제주도민의 이야기가 화제입니다. 24일 제주맘카페에 “관광객들에게 무료 숙박을 제공하겠다”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회원들은 전화번호를 남겼고 숙박을 제공했습니다. 공항에 있던 승객들에게 모포와 김밥 등을 나눠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조선시대 백성을 구한 ‘김만덕의 정신’이 부활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김만덕(金萬德)은 누구일까요? 주로 장사로 돈을 많이 번 거상(巨商)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김만덕은 1739년 제주에서 양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고아가 됩니다. 기녀에게 의지하면서 살았기에 관기(官妓)로 이름이 올라갑니다. 20세가 지나고 관아에 억울함을 호소해서 양인 신분을 회복합니다. 늘 검소하게 살았고 무역업으로 부자가 됩니다. 

1792년부터 제주도에 흉년이 듭니다. 제주목사가 조정에 구호미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바다를 건너려던 선박이 침몰합니다. 모두가 놀랍니다. 이대로 굶어죽게 생겼으니깐 요. 이 소식을 들은 김만덕은 전 재산을 바칩니다. 육지의 곡식 500여 석을  사들여 구호식량으로 씁니다. 당시 50대 여인의 선택은 꺼져가던 생명에 불을 지핀 것입니다. 거상에서 의인(義人)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죠. 

김만덕은 정조임금으로부터 벼슬도 받고 평생의 소원인 금강산 관광도 다녀옵니다. 1872년,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슬하의 자녀도 없습니다. 그러나 김만덕을 기리는 제주도민의 후손들이 200년 만에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그 정신은 관광객을 돕는 손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김만덕과 비슷한 출신으로 나라를 구한 의인(義人)이 있지요. 바로 임진왜란(조일전쟁) 때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든 조선의 관기, 논개(論介, ? ~ 1593)입니다.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에게 패배하자 조선의 많은 장수들이 자결합니다. 그러나 논개는 신라의 화랑, 관창처럼 혼자서 왜장을 죽이러 갑니다. 논개가 왜장과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자 왜군의 전승 축하연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뀝니다. (단군문화기획 99편 누가 기생이라고 하는가? 조선 최초의 의병이다. 바로가기 클릭) 훗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나 상해서 열린 일본군 전승 축하연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보다 300년 이상 앞서 행한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역사에서 의로운 여인들이 많습니다. 단지 남자들의 역사(He-history)에 가려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 재산을 바칠 수 있다는 것. 총과 칼이 없지만 몸을 던져서 적장을 죽이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것. 이것이 인간사랑이고 나라사랑입니다. 루마니아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극찬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같습니다. 게오르규는 “홍익인간이라는 단군의 통치이념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법률”이라며 “홍익인간 정신이라면 개인의 어려움은 물론이요, 세계의 모든 난제를 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김만덕과 논개는 단군의 자랑스러운 후예이자, 홍익인간입니다. 이를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교육하여 실천하는 인재로 만드는 것이 우리 교육의 몫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