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개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에 봉안된 논개 영정은 가로 110㎝, 세로 180㎝ 크기로 비단에 천연채색을 한 정면 전신입상이다. 친일화가 김은호 화백의 그림을 거둬내고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2008년에 새로 그린 것이다.(사진=윤한주 기자)

아무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이더라도 기록이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잊힐 뿐이다. 논개는 1593년(선조 26년)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의 자축 술판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촉석루 아래로 유인해 함께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순국은 진주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졌다. 28년 후 유몽인(1559∼1623)이 <어우야담(於于野譚)>에 기록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의 글이 논개를 부활시켰다고 할 수 있다. 

책을 본 진주의 선비들은 인조 7년(1629)에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했다. 경종 2년(1722)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그러나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은 상소로 이뤄졌다. 박철조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의 말이다.

 
“진주의 선비들이 해마다 왕에게 상소합니다. 그런데 매번 돌아오는 거에요. 원인을 알아보니까 논개가 천한 기생출신이라고. 보통 사람의 모범이 못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후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의로운 기생에게 포상을 내려달라(의기정포義妓旌褒)고 상소를 올립니다. 영조임금 때 사당이 내려옵니다. 논개가 돌아가시고 147년 만에 내려온 것입니다. 비록 작은 사당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자가 왕으로부터 사당을 받은 것은 논개밖에 없습니다.”
 
▲ '의기논개지문'이란 현판이 걸린 의암사적비(사진=윤한주 기자)
 
남덕하는 1740년 영조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했다.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고 지금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한 것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수많은 의병이 관군과 함께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천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포상을 받지 못한 것은 비단 논개만의 일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러자 노비들은 대궐에 불을 지르고 일본군에 가담했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특단의 대책을 내놓는다. 왜적의 머리를 베어오는 공(功)의 크기에 따라 신분상승을 시켜주는 면천법(免賤法)이 그것이다. 많은 노비가 의병에 가담하고 전세도 바뀐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고 했던가?(인심조석변人心朝夕變) 전쟁이 끝나자 류성룡의 개혁 정책은 모두 무효로 해버린 것. 심지어 류성룡은 포상을 받지도 못하고 파직당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양반우월사회에서 논개처럼 천한 신분을 가진 백성에게 포상을 내리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의기사 현판을 살펴보면 다산 정약용, 매천 황현, 기생 산홍이 논개를 예찬하며 쓴 글이 걸려있다. 그들의 글보다 더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논개의 영정이다. 
 
“손가락에 가락지가 10개가 끼워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왜군 장수를 껴안았을 때 손가락이 빠지지 말라고 그런 것입니다.”
 
가락지는 진주교 아래 교각 사이에도 걸려 있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함이다. 논개의 가락지를 보면서 문득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떠올랐다.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서 혈서를 쓴 남자현(南慈賢, 1872-1933)과 임신한 몸으로 일제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安敬信, 1888-미상)이다. 논개가 조선의 관기(官妓)에서 의기(義妓)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기생이라는 타이틀은 버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일항쟁기 수많은 여성독립동가보다 앞서 나라를 구한 최초의 여성의병이기 때문이다.
 
▲ 논개의 순국을 기리는 의암(義岩). 가로 3.65m, 세로 3.3m(사진=윤한주 기자)
 
또 하나 봐야 할 것은 영정이 새로 그려진 것이다. 
 
“옛날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의 미인도가 걸려 있었어요. 그런데 친일행위가 드러난 거죠. 우리 진주성은 일본과 원수가 깊은 땅입니다. 영정을 거둬내고 충남대 윤여환 교수님이 그린 겁니다.”
 
김은호(金殷鎬, 1892-1979)는 대일항쟁기 때 미술계에서 친일파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1937년 11월 가장 먼저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미인도에는 가락지가 없다. 머리를 곱게 빗은 전형적인 조선의 여인상이다. 일본 앞잡이로 살면서 호의호식하던 김은호가 일본 장수를 죽인 논개를 그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아무튼 논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자다. 그녀의 죽음은 단군의 가르침을 담은 <참전계경(參佺誡經)>에서 말하는 의리의 모델이 아닐 수가 없다. 
 
“뭇 사람들은 의리를 버리고 자기 몸을 지키며 밝은이는 자기 몸을 버리고 의리를 지킨다.(衆人 捨義而全身 哲人 捨身而全義)”
 
한편 진주시는 지난 2002년부터 5월에 논개를 비롯해서 진주성에 선국한 7만 여명의 충절을 기리는 ‘진주논개제(晋州論介祭)’를 개최하고 있다.(계속)
 
 

■ 진주성 찾아가는 방법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055-749-248 (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논개는 우리나라 여성 제1호 의병", 오마이뉴스. 2006.11.09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13
이덕일, <칼날 위의 역사>, 인문서원, 2016
편집부,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문화 편집부, <천지인>, 한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