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충절의 땅이다.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시민 장군은 3,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왜군 2만 명을 물리쳤다. 그 유명한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이듬해 2차 전투에서는 7만 민관군이 10만 왜군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다. 승전을 자축하던 왜군의 자리에서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이가 있었다. 조선의 관기 논개다. 이러한 역사는 교과서에 잘 나와 있다.

그런데 놀랍지 않은가? 진주의 목사부터 기생까지 모두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충성을 다했다. 당시 조선의 선조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도주했다. 유교를 받들던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주인들의 애국정신은 외국에서 오지 않았다. 이곳에 나라를 세웠던 신라에서 찾을 수가 있다. 

▲ 진주성과 촉석루(사진=윤한주 기자)
 
신라인들의 평생화두
 
단군조선의 유민이 세운 신라 600년(진평왕)의 일이다.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청했다. 
 
원광은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는데 그 조목이 열 가지나 되니 너희가 남의 신하로서 이것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세속에 다섯 가지 계율이 있으니 이것을 지키도록 하라. 첫째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라(事君以忠), 둘째 부모에게 효도하라(事親以孝), 셋째 벗과는 믿음으로 사귀라(交友以信), 넷째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마라(臨戰無退), 다섯째 함부로 살생하지 마라(殺生有擇)”고 하였다. 두 사람은 이를 잘 지켜서 602년 백제와의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의 화랑으로 싸우다 순국했다. 
 
중학교 국사교과서는 화랑들이 원광의 가르침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세속오계는 불교 이전의 가르침이다. 이는 신라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이 교를 만든 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나와 있다”라는 것에서 알 수가 있다. 역사저술가 김종성은 “오계가 나온 곳은 불교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신라 사회를 지배한 종교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종교는 신선교(神仙敎)”라고 말했다. 
 
당시 신라에서 유교는 682년(신문왕2)에야 정식으로 설립됐다. 불교는 527(법흥왕4)에 공인됐지만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신라의 선도(仙道)가 주류이던 시절이다.
 
내용도 다르다. 유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나 충신출어효자지문(忠臣出於孝子之門)처럼 효가 충보다 앞선다. 그러나 세속오계는 첫 번째가 충(忠)이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임전무퇴 정신은 고려의 대몽항쟁과 조선의 의병으로 이어졌다. 진주성을 단순히 일본과의 전쟁을 치른 유적지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자.
 
▲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유명한 진주 촉석루(사진=윤한주 기자)
 
조일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어릴 적에는 백사장이었습니다. 대나무가 있었고 학이 날아가고 은어가 강물에 반짝거리고……. 여기가 유토피아에요. 선경(仙境)이죠.”
 
진주성 촉석루에서 남강을 바라보는 데 박철조 진주시 문화관광해설사의 눈빛이 빛났다. 고향을 선경이라고 표현하니, 진주시민은 모두 선인(仙人)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진주에 대한 평가는 예부터 명성이 높았다. 고려의 문신 이인로(1152~1200)는 <파한집(破閑集)>에서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고 말했다. 진주목사였던 김지대(1190~1266)는 상주목사 최자(1188~1260)에게 보낸 편지에서 "낙읍(洛邑: 상주)의 계산(溪山: 자연)이 비록 좋기는 하나 진주의 풍월(風月) 또한 선향(仙鄕)이라네"라고 자랑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에 세워진 진주성은 전체 면적이 17만 6804㎡(약 5만 3500평)에 달한다. 석성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 정도다. 삼국시대는 거열성, 남북국시대는 만흥산성, 고려시대는 촉석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부터 진주성, 또는 진양성으로 불렸다고 한다. 현재 사적 제118호로 지정됐다.
 
특히 촉석루는 평양 부벽루와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유명하다. 진주성을 휘감아 도는 남강과 촉석루는 한 편의 그림이다. 
 
촉석루의 이름은 3가지다. 먼저 강 가운데 돌이 뾰족한 까닭에 누대의 이름을 촉석(矗石)이라고 했다. 또 진주성의 남쪽 벼랑위에 솟아 있고 임진왜란 때 남쪽 지휘대로 사용해서 남장대(南將臺)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그 외 장원급제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서 장원루로 불린다. 
 
촉석루는 2층인데 사방에 벽이 없이 청풍명월(淸風明月)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난간 밑에도 구멍을 뚫어 바람이 드나드는 데 걸림이 없도록 했다. 이를 풍혈(風穴)이라고 하는데 구름모양으로 되어 있다. 마치 선인들이 구름 위를 오르는 것처럼 형상화한 것일까? 신선사상이 누각에 반영된 것은 남원의 광한루도 마찬가지다.(바로가기 클릭)
 
신발을 벗고 마루처럼 돌아다니는 관광객은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유명한 누각이지만 부벽루나 영남루처럼 국보나 보물도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촉석루는 1241년(고려 고종 28년)에 처음으로 건립됐다고 한다. 이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마지막 중수는 1725년(영조 1년)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했다. 문화재 지정은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있고 100년 이상 지난 건축·그림·서적 등을 대상으로 한다. 촉석루는 1983년에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8호로 지정됐다. 
 
이제 의로움의 성녀(聖女), 논개를 만나보자. 그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살아 돌아온 선조 임금은 논개를 포상하지 않았다.(계속)
 

■ 진주성 찾아가는 방법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055-749-248 (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국학연구원,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김종성, <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역사의 아침, 2015년
<[문화재 탐방-진주 ①] 촉석루에 앉아 진주대첩 충의에 잠기다>, 천지일보, 2010년 5월 30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편찬부 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24, 한국학중앙연구원, 1997년
<황경규의 촉석루 이야기-남강 우뚝한 바위 위에 세운 누대 이름하여> , 경남일보 2011년 10월 18일
<한국 3대 누각인 이곳이 문화재자료에 불과?>, 오마이뉴스, 2016년 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