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진안군 양명마을 단군전이다. 왼쪽은 옛 건물이고 오른쪽은 한옥으로 증축한 모습이다(사진=진안군청 제공)

“수십 년 동안 주민들이 계를 조직해서 단군제를 지냈어요. 음력 3월 15일에 제사만 합니다. 옛날에는 3개 면이 지냈고 (참석한 인원이) 100명도 넘었습니다. 지금은 2개 마을이 참여하고 있어요.”

조성섭 양명마을 노인회장(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운봉리)은 단군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3월 15일은 조선을 통치한 제1대 단군왕검이 하늘에 오른 날이다. 이를 어천절(御天節)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御)는 임금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임금이 하늘로 용이 날아가는 것을 표현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대표적이다.

 

어천(御天)을 찾아서

고려시대 역사서인『삼국유사』나 『제왕운기』는 단군의 죽음을 어천이라고 하지 않았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고 나이가 1,908세였다”고 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단군은 1,038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어 죽지 않았다.”라고 했다. 두 역사서 모두 단군의 죽음을 산신이 되었다고만 했다.

어천이란 단어는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교헌의『신단실기(神檀實記)』에서 찾을 수가 있다. 이 책은 단군에 관한 사적과 선도사상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단군이 죽은 뒤 하늘에 오른 것(化神御天)으로 표현했다.

“217년 경자 3월 15일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으로 변하여 하늘에 오르니, 개천한 지 217년요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93년이다. 몇 세대를 전했는지 알 수 없으나, 역년은 1212년이다. 태백산과 아사달산에 모두 사당이 있다. - 『신단실기』”

二百十七年庚子三月十五日, 入阿斯達山, 化神御天, 開天, 二百十七年, 在君位, 九十三年. 傳不知幾世, 歷一千二百十二年. 太白·阿斯達, 皆有祠. -『神檀實記』

그가 펴낸 역사서인『신단민사(神檀民史)』에도 “아사달에서 석대가 있는데 단군어천대(檀君御天臺)라고 부른다”고 했다.

 

정성으로 단군을 모시다!

다시 단군전으로 돌아가면, 어천절에는 제주들이 머리에 건을 두르고 제복을 입는다. 제물을 차리고 정성껏 제사를 올린다. 조 회장은 이렇게 해온 지가 오래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료를 조사해보니, 원 이름은 단운사(檀雲祠)이었다. 최근에 군의 지원을 받고 한옥으로 복원됐지만, 이전에는 자그마한 사당에 불과했다.

1965년 채법선(蔡法善)과 최일태(崔一泰)의 발의로 시작됐다. 122명의 제원(祭員)이 함께했다. 성금도 모였다. 이어 100평의 터를 닦아서 세웠다고 한다. 합석 지붕에 정면 1칸, 측간 1칸이었다. 당시에는 단군과 기자 등 여러 탱화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조 회장은 탱화를 잃어버리고 단군영정을 걸게 되었다고 전했다.

채법선은 천황암 보살이었다. 광복 직후부터 단군제를 정성을 다해 모시는 것을 주민들이 보고 감동받았다는 것이다. 이어 주민들의 참여로 단운사를 세울 수 있었다.

『진안군사』나 『진안의 문화재』에 따르면, 탱화는 3명이었다. 왼쪽은 단군이었고 오른쪽은 기자이며, 그 밑의 단위에는 함이 있었다. 단군천황신위, 기자성군신위가 그것이다. 중앙의 인물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사당 왼쪽 벽에는 발기인 최일태를 비롯해 122명을 담은 단운사 제원명부 현판이 있었다. 현판에는 단기 4298년 삼월(三月) 이강(以降)이라고 적혀 있다. 이밖에 제복 7벌과 유건 20조가 함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 단군전 찾아가는 방법

진안버스터미널에서 조림정류장까지 갔다가 다시 주천면 윗양명마을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바로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