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도립공원 입구에 있는 이산묘 전경(사진=윤한주 기자)

1907년 9월 12일, 정재 이석용(靜齋 李錫庸, 1878∼1914)은 동지들과 마이산에 모였다. 산 아래 용바위에 제단을 쌓았다. 이곳에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라고 크게 써 붙였다. 사람들은 ‘의병창의’라고 쓴 머리띠를 동여맸다. 마음을 모아 창의고천제를 올렸다. 전라북도 항일의병활동의 시작이었다. 의병의 수가 500여 명이었고 성원하기 위해 모여든 민중들까지 포함하면 천여 명이 넘었다. 고천제가 끝난 후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정재 이석용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정재 이석용 의병대장은 동지들과 진안, 영광, 고창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후 일제와 수십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지만 일경에 체포됐다.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올해가 100년이 된다.

▲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도립공원 입구에 있는 이산묘 내 회덕전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사진=윤한주 기자)

애국지사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1906년 목동 최제학의 삼우당에서 머물렀다. 이때 마이산에 올라서 쌍계수석이란 표제를 남겼다.

고종황제 스승인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1836∼1905)은 한때 마이산에서 유람한 적이 있다. 선생은 1900년 8월에 고을의 여러 선비와 용암에 이름을 새겼다.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라는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결국 노예의 지경에 빠질 것"이라며 조약의 파기와 을사 5적의 처단을 제기했다. 또한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우국강연을 했고 항일투사를 양성했다.

이처럼 마이산은 5천 년 단군의 땅을 지키고자 맹세한 항일운동의 성지였다.

▲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도립공원 입구에 있는 이산묘 내 회덕전(사진=윤한주 기자)

나라를 창건하셨기에 단군을 모신다!

마이산에 오르기 전에 이산묘를 만났다. 이곳에 국조 단군을 모셨기 때문이다. 앞서 마이산과 인연이 깊은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의 제자들이 건립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이산묘는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일까? 처음에는 이산사(駬山詞)라고 했다. 성균관에서 묘(廟)와 전(殿)이 격이 높다고 해서 이산묘로 개명한 것이다.

1924년 12월 18일 유림회의가 열렸다. 이날 오채열(吳采烈, 1885∼1859)의 발의로 마이산에 사당을 짓고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자는 결의가 있었다.

▲ 이산묘 회덕전에는 단군왕검, 태조, 세종, 고종를 모시었다(사진=윤한주 기자)

오채열은 본관은 함양으로 이조판서 팽숙(彭淑)의 후손이며 통정대부 상권(相權)의 아들이다. 1958년 성균관 사성 겸 유도회총본부 상무위원을 역임했다. 이듬해 이도복(李道復)이 이산정사 건축임원 도유사로 선임됐다. 그해 4월에 인지재仁知齋(서쪽)와 여택헌麗澤軒(동쪽, 제관실)의 이산정사를, 9월에 회덕전을 낙성했다. 이산묘에 걸려 있는 마이산기(馬耳山記), 이산구곡가(駬山九曲歌)는 그의 작품이다.

회덕전은 태조 이성계의 위판을 모시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었다. 이산정사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됐다. 또한 정사 뒤편에 고경각을 건립해 연재 송병선, 면암 최익현의 진영을 봉안해 제사를 지냈다.

당시 대일항쟁기임에도 수 백 명이 모여 위험을 무릅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때마다 일본 순경들이 난입하여 무력으로 진압했다. 사람들이 다치고 구속 수감됐다.

▲ 이산묘 왼쪽은 영광사라고 하여 순국선열 34위를 모시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1946년 오채열은 회덕전은 한 고을이 아니라 여러 고을의 동의를 구하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흔쾌히 승낙했다. 이때 “형주 백성이 구덕(舊德)을 사모한다면 어찌 이태조(태조 이성계) 한 분에 한정할 것인가? 단군 성조께서 나라를 창건하신 공이나 세종대왕께서 문자를 만드신 덕은 만세토록 잊을 수 없으니 아울러 모심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회덕전에는 단군과 태조, 세종을 모시게 된 것이다. 회덕전 아래의 동서 두 사우를 지었다. 동쪽은 영모라 불러 조선의 개국이래로 명유 40위를 모시었다. 서쪽은 영광사라 불러 고종 을사년 이후에 연재, 면암, 순국선열 33위를 모시었다. 훗날 조선말 순국지사 매하 김근배(梅下 金根培, 1847∼1910)가 빠진 것을 뒤늦게 알고 1967년에 추가하였다. 현재 34위의 위패가 있다.

▲ 이산묘 내 대한광복기념탑(사진=윤한주 기자)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해방 후에는 이산묘 안에 함태영 부통령의 글을 받아 대한광복을 기념하는 커다란 비석을 세웠다”라며 “마이산 일대는 단군정신이 깊이 배인 곳으로 그것이 원천이 되어 항일 구국정신이 솟아난 지역”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산묘의 주필대는 고려 말 이성계가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黃山)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돌아오다가 머물렀다고 한다. 바위 윗부분에는 1907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집결지로서 황단(皇壇)터가 있다.

∎ 진안군 이산묘

전북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 (약도 클릭)

∎ 참고문헌

정영태, 이산묘의 건립과 변천에 대한 연구, 역사문화학회 2013년
최규영, 마이산 학술 연구, 진안문화원 2002년
박성수, 단군문화기행, 석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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