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탑사 전경(사진=윤한주 기자)
 
마이산 돌탑은 참 풀기 어려운 숙제와 같았다. 탑을 둘러싼 이견은 많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갑룡 처사가 혼자서 돌탑을 쌓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했다는 것은 이 처사의 장손 이왕선(혜명스님) 씨도 인정하는 바다. 최규영 진안향토사연구소장(전 진안문화원장)은 “사방 80cm의 돌이라면 1,200kg 즉, 1톤이 넘는 무게에 해당하고 이런 무게라면 지렛대로 굴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 올릴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이 처사가 축지법으로 전국의 명산에서 돌을 가져다가 쌓았다고 하는 것은 탑사 측의 ‘과대광고’가 아닐까 싶다. 
 
현재 탑사에는 천지탑, 오방탑, 33신장군탑, 중앙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지탑(天地塔)이 눈에 띈다. 높이가 13.5m에 이르고 동북좌 남서향으로 축조됐다. 천지탑은 음과 양을 뜻하고 보는 쪽에서 오른쪽은 하늘이며 왼쪽은 땅을 뜻한다고 한다. 
 
축조시기 ‘논란’
 
조성시기에 대해 문명대 동국대 교수(마이산탑사연구 책임연구원)는 “기법상으로 봐도 돌담식 허튼막돌식 쌓기로 축조하였고 정교한 축조법과 시멘트보강 등으로 보아 1900년대 이후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반면 최규영 소장은 탑이 이 처사 이전부터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 지방 출신인 하립(河砬, 1769~1830)의 문집에서 발견된 ‘속금산리탑중중(束金山裡塔重重)’라는 시구가 거론된다. 이 처사보다 100년 전에 살았던 하립이 그의 문집에 마이산(속금산의 다른 이름)에 탑이 여러 개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최 소장은 “불탑은 대개 사리탑으로 여러 개를 조성하는 예가 없다. 그러니 불탑이라면 석탑, 전탑으로 중중(重重)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중중한 탑들의 자취는 마이산 어디엔가 남아있어야 마땅하다. 결론은 간단한다. 그 자리는 바로 현재의 천지탑 부근이다. 즉 천지탑군은 이갑룡 보다 적어도 100년 전에 그 자리에 있던 탑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왕선 씨는 "그 시구는 '마이산 속에 탑이 겹쳐 쌓여 있는데'라고 해석하는 이도 많다"라며 "조부께서 탑을 쌓는 모습을 보았다거나 아니면 어른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는 이들이 이곳 진안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반박했다. 
 
▲ 마이산 탑사 천지탑(사진=윤한주 기자)
 
천지탑의 정체는?
 
탑을 세운 목적은 “억조창생을 구원하고 만국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일념”이라고 <도사 이갑룡선생 사적비>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천지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마이산이 서다산, 즉 소도산이라고 불렀다는 근거로 탑을 쌓은 것은 소도의 관행이라고 밝혔다. 
 
소도란 마한의 유습 중에 하나다. 
 
“여러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천군이라 부른다. 또 소도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남쪽의 경계는 왜에 가까우므로 문신한 사람도 있다. 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天君 又立蘇塗 建大木以懸鈴鼓 事鬼神 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 - 후한서 권제85, 10장 뒤쪽, 동이열전 75 마한조”
 
이 솟대는 단군사화에 나타나는 신단수(神檀樹)의 변천으로 본다. 신성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박 교수는 “불사의 인공적인 탑이 아니다. 탑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때, 처음에는 자연석을 쌓아올린 탑이었다가 후에 인공적으로 깎아 맞춘 탑으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이 발전한 탑이 불교가 들어온 뒤에 생겨났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불교 이전부터 탑을 쌓아 치성을 드리는 소도의 관행”이라고 말했다.
 
진안군 측은 “탑의 정확한 명칭은 ‘막돌허튼씩 쌓기 솟대’가 맞다. 그 이유는 이 탑은 불의 사리를 모신 탑이 아니고 마을입구나, 산등선에 있는 돌무덤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돌 하나에 수많은 인간들의 소원을 하늘에 알리고자 애원하는 솟대인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최 소장은 풍수 지리적으로 쌓은 비보탑으로 본다.
 
“택리지(擇里志)에는 계룡산이 ‘전라도 마이산 맥의 끝이다’라고 적고 있다. 마이산과 계룡산은 지맥이 통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금강을 풍수가들은 소위 반궁수(反弓水)형이라 부르는바 송도뿐만 아니라 한양까지를 겨누는 형국이며, 계룡산의 신도에도 또한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라고 적고 있다. 금강이 반궁수 형국이라고 한다면 계룡산은 화살촉이 된다. 계룡산이 화살촉이라면 계룡산은 마이산 맥의 끝이라고 했으니 마이산 맥이 화살이고 마이산은 화살 손잡이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이 지세는 송도나 한양을 국도로 둔 고려나 조선왕조에는 불길한 형국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이산에는 국토를 진호(鎭護)하기 위한 차원에서도 비보(裨補)해야 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마이산에는 어느 시대 어떤 형태로든지 비보가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만일 비보가 행해졌다면 마이산에는 흔한 자연석을 이용한 비보탑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문명대외, 마이산탑사연구, 진안군1995년
최규영, 마이산학술연구, 진안문화원 2002년
박성수, 단군문화기행, 석필, 2009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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