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옛말이 있다. 한번 보는 것이 100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뜻이다. 그런데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다. 반세기 전 전라북도 고창 주민들이 그러했다. 당시 사람들은 고인돌을 ‘커다란 바위’로 인식했다. 농작물을 말리는 돌로 사용했다. 이후 연구가 진행되자 고인돌은 세계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전 세계에 약 7만기의 고인돌이 있고 이 가운데 3만 개 이상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지난 5일 고창 고인돌 유적지를 다녀왔다.

▲ 고인돌박물관 옥상에서 바라본 고창 고인돌 유적(사진=윤한주 기자)

# 세계적인 ‘미슐랭가이드’에서 최고점 받아!

고인돌이란 명칭은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고여 있는 돌’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하문식 세종대 교수는 “고인돌 분포 지역이 고조선을 대표하는 표지(標識) 유물인 비파형동검 분포권과도 거의 일치한다”며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공통문화를 가진 고유한 집단이 있었다는 뜻으로 고조선의 실체를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했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 학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20세기부터 기원전 3∼2세까지 추정하고 있다.

고인돌 유적지 가운데 고창이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고인돌이 가장 조밀하게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무려 442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다.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 각종 형식의 고인돌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2000년 12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또한 2009년도에 개원한 고인돌박물관은 세계적인 여행안내서 ‘미슐랭 가이드’ 한국 편에서 ‘꼭 가볼 곳’으로 별점 3개(★★★)의 만점을 받았다. 미슐랭가이드는 프랑스 타이어회사인 미슐랭이 가볼 만한 세계의 관광지나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여행안내서다.

1층은 수장고(233㎡)와 3D입체영상실(251㎡), 기획전시실(225㎡), 2층은 상설전시실(1291㎡), 3층은 체험전시실(251㎡)과 옥상정원(390㎡)으로 꾸며져 있다.

▲ 고창 고인돌공원이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고인돌이 수백개 모여 있다.세계 최고의 고인돌 밀집지대다.(사진=윤한주 기자)

# 고조선 과학기술의 결정판

고인돌의 용도는 사람 뼈가 출토된 것을 바탕으로 ‘무덤’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박물관 2층에 올라가면 사람이 죽자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 동물이나 적으로부터 시체를 보존하기 위해 돌로 무덤을 만드는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무덤으로 보는 것에는 2가지 오해가 있다. 먼저 무덤의 주인공이 ‘지배자’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하문식 교수는 지배자 무덤에는 비파형 동검이나 옥 등이 출토되는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대부분 민무늬 토기나 화살촉 등이 나온다. 따라서 지배와 피지배 상관없이 고조선 사회 전체의 무덤문화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바로가기 클릭)

두 번째 오해는 기후에 따라서 탁자식 고인돌과 기반식 고인돌 양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기후가 추워서 시체가 빨리 썩지 않는 한강 이북에서는 시체를 지상에서 처리하는 탁자식 장법을 썼고 기후가 더워 시체가 빨리 썩는 한강 이남에서는 시체를 지하에 묻는 기반식 장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고창의 탁자식 고인돌은 왜 한강 이남에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따라서 고인돌이 무덤뿐만이 아니라 여러 용도로 사용됐다는 점이 설득력이 높다. 고인돌이 종교 또는 신앙 행사에서 제단으로 사용했거나 묘역을 상징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고인돌에 새겨진 구멍을 별자리로 보는 논문도 있다.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가 세계천문학의 발상지로 보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도 인위적으로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반론도 있다.

이번에 둘러보면서 주목한 것은 고조선인들의 높은 기술력이다.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자. 우선 쓸 만한 돌을 찾아내거나 커다란 암반에서 떼어내는 방법으로 석재를 구한다. 암반으로부터 떼어낼 때에는 바위 결을 따라 난 조그만 틈에 깊은 홈을 파서 나무말뚝을 막고 물에 적시는 방법을 택한다. 이렇게 하면 물에 불어난 나무가 바위를 가른다. 떼어낸 돌을 운반하는 작업은 큰 통나무 여러 개를 깔아놓고 옮긴다. 땅을 파서 고임돌을 세운 뒤에는, 고임돌의 꼭대기까지 흙을 쌓아올려 경사가 완만하게 둔덕을 만들고, 둔덕을 따라 덮개돌을 올린 뒤, 흙을 치우면 고임돌 위에 덮개돌이 얹힌다. 고임돌과 덮개돌로 인해 생긴 공간에 주검과 부장품을 넣은 후 편편한 돌판으로 막으면 모든 과정이 마무리된다.

사람이 통나무와 밧줄로 30t의 덮개돌을 끌려면 약 200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5인 가족을 기준으로 1∼2명이 동원됐다고 하면, 약 30t의 덮개돌이 얹힌 고인돌을 만든 집단의 인구수는 1,000명 이상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고인돌을 만든 집단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분업화된 전문 장인과 조직을 통해 자연광물에서 청동을 뽑아내고 칼을 만들었다. 이는 정착생활과 농업경제의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 높이 1.8m 덮개돌 길이 3.5m 완벽한 탁자형태인 도산리 고인돌이다.(사진=윤한주 기자)

# 동아시아 최고의 수도가 아닐까?

유적지 탐방에 앞서 고인돌 박물관 옥상에 오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왜 이곳에 고인돌이 많았는지 알 수가 있다. 다음은 고창 출신 강희석 문화해설사의 말이다.

“산 밑의 남쪽은 따뜻합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줘요. 앞에는 냇물(고창천)이 흘러요. 조금만 내려가면 바다에요. 서해에서 물고기가 많이 올라와요. 오른쪽 봉우리와 왼쪽 봉우리 사이로 넘어가는 오솔길이 보이죠. 작은 산들이 선운사까지 연결 되요. 산에는 멧돼지, 사슴 등 짐승들이 많이 살았어요. 앞으로는 들판이 넓어요.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에요. 소문이 나니깐 몰려든 거겠죠. 이곳이 고인돌 왕국입니다.”

과연 그러했다. 이렇게 좋은 곳이라면 나라를 세워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배를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출신이 다양한 만큼 고인돌 또한 다양한 형식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 유적지를 가보자. 죽림리 일대 성틀봉(151m) 기슭에서 고창천을 따라 길이 1.8km 내에 442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다.

유적지는 6개의 탐방코스가 있다. 1코스는 언덕 위에 서서 한 번에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을 볼 수 있다. 2코스는 두꺼비 모양을 닮거나 100t에 육박하는 거대한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옛 마을이 있던 3코스 일대에는 128개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4코스는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돌을 잘라내던 채석장이다. 5코스에는 고인돌 220개가 몰려 있다. 마지막 6코스는 다른 코스와 동떨어져 있다. 도산리 고인돌이라 불리는 탁자식 고인돌이다. (계속)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 찾아가는 방법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에서 나와 우회전 3km 가면 고창고인돌공원과 고인돌박물관이 있다. 이곳에서 죽림리 고인돌까지는 700미터 걸어가면 된다. 도산리 탁자식 고인돌을 보려면 고인돌 박물관 입구 좁은 농로로 1km 정도 가면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고창버스터미널에서 고창 고인돌 박물관까지 직행하는 시내버스가 많지 않다. 상하, 해리, 아산, 무장, 공음, 선운산 방면 시내버스는 고인돌박물관 입구 회전교차로를 경우하게 됨으로 교차로에서 내려서 700m정도 걸으면 된다. (바로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