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창읍성(사적 제145호)은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만 5,858㎡에 달한다.(사진=윤한주 기자)

오리지널(Original:원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단군문화는 유교, 불교, 도교 등 외래 종교와 혼합된 상태다. 따라서 남아있는 흔적에서 홍익유산을 가늠할 뿐이다.

지난 5일 전라북도 고창군 고인돌 유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이 있었다. 이름이 독특했다. 방장산(方丈山, 743m)이다. 주민들은 고창의 주산(主山)이고 영산(靈山)이라고 부른다.

불로장생을 염원했던 진시황(秦始皇)이 제나라 출신 방사(方士)인 서복(徐福)에게 “바다 가운데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 등 3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신선을 찾아달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그 산의 이름과 같았다.

‘장성군읍지’는 “고부의 두승산을 영주산, 부안의 변산을 봉래산이라 하여 방장산과 함께 세 산을 삼신산이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이름은 반등산(半登山)이었다. 이후 조선 인조 때 중국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과 닮았다고 하여 현재 지명이 되었다. 혹시 ‘천제단’이라도 있을까 기대했지만 전승 자료나 유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고창읍성을 찾아서

▲ 고창읍성은 ‘성밟기 놀이’가 유명하다. 작은 돌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것이다.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또 없을까? 알아보니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다고 한다. 방장산을 둘러싸고 있는 고창읍성 내 성황사(城隍詞)가 그것이다. 현장으로 이동했다.

읍성은 고창시내에서 멀지 않았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인데 읍성으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것이 눈에 띈다. 관광객도 있었지만 산책하러 나온 주민들도 많았다. 단풍으로 물든 고창읍성의 가을을 만끽하려는 것 같았다.

읍성(사적 제145호)은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16만 5,858㎡에 달한다. 동·서·북의 3문과 치(雉) 6곳, 옹성(甕城), 수구문(水口門) 2곳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성밟기 놀이’가 유명하다. 작은 돌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것이다.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이 있다.

성황사는 입구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만날 수가 있다. 돌로 쌓은 탑 옆에 암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안내문을 살펴보니 “성황신(城隍神)은 고을의 평화와 풍년을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으로 섬겨왔으며 지금도 매년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 모양성제(牟陽城祭)날에 이곳에서 제사를 올린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황신은 누구인가?

▲ 고창읍성 내 성황사와 돌탑이다. 전문가들은 단군문화의 유산으로 보고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단군문화의 원형 vs 중국문화의 유입

성황(城隍)이라는 말은 중국도교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도교에서 성황신은 성지(城池), 곧 성읍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해자(垓字)의 수호신으로 성읍 수호신, 농경신, 수신(水神)이다. 후당(後唐)대에 봉작되어 송대 이후에 성황신 신앙이 성행했다. 이를 근거로 이능화(李能和, 1869∼1943)는 ‘조선무속고’에서 송대의 성황신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는 “고려에서 중국 도교 용어인 성황을 수용했으나 중국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라며 “한국 마을의 수호신이 중국 마을의 수호신과 같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성황의 신은 한국 고대 이래 선도 전통에서 나온 신, 곧 선도성인(仙道聖人)이라는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성황당은 선왕당(仙王堂)으로 불리었다며 마한(馬韓) 소도(蘇塗)의 유속(遺俗)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근거를 찾는다.

정 교수는 “선왕(仙王)이란 선도의 사제왕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선도성인인 삼성(환인․환웅․단군)을 지칭하는 것”이라며 “소도는 고대 선도의 신성지역으로 제천의례의 장소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했다.

▲ 고창읍성 내 성황사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은 성황(城隍)에 대해 선왕(仙王)으로 불리었다고 밝혔다.(사진=윤한주 기자)

또한 안내문은 “성황신은 서낭신이라고도 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독립운동가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신단실기’에서 서낭당 제사의 유래는 단신제(檀神祭)라고 주장했다. 서낭당의 신이 단군(檀君)임을 밝히고 있다. 단신제는 고구려와 발해, 요, 금을 거쳐 그 전통을 이어왔다고 했다.

민속학자 손진태(孫晋泰 1900∼?)와 국문학자 조지훈(趙芝薰, 1920∼1968) 또한 단군문화로서 ‘서낭’이 고대의 경계표 돌무더기에서 점차 경계신의 처소, 제단 등으로 인식했다.

이형래 세계역사문화연구소장은 “마을마다 신산(堂山)과 신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단군도 신단수 아래, 곧 뫼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천자(祭天者)였다는 것이 최남선의 연구”라며 “마을은 산을 만들고 돌을 쌓고 신수(神樹)를 정했다. 하늘에서 높은 산으로, 다시 마을의 낮은 산, 돌더미와 나무에 임재한 것으로 믿었다. 돌 쌓음(累石)과 신수, 당집 신앙의 중심은 천신숭배”라고 설명했다.

안내문은 성황사의 주인을 “고을을 지켜주는 지신(地神)으로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민간신앙으로 발전했다”라고 밝혔다.

이제는 성황사를 중국이나 민간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국학, 선도문화(仙道文化)로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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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받은 자료
국학연구원, ‘한국선도의 역사와 문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박성수, ‘단군문화기행’, 석필, 2000년.
이형래, ‘민간신앙의 원류는 단군’, 주간경향, 2005년.

글. 사진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