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제적이고 일방적으로 맺은 ‘합방 조약’을 내세워 조선 땅을 강탈했다. 이들은 1906년에 설치했던 이른바 ‘조선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이름을 바꾸고 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보내왔다.

그러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년 10월 1일부터 관보(官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 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 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 권을 수거하여 불태웠다. 그 무렵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역사 말살의 선봉으로 움직인 것은 교토대학 조교수였던 젊은 국수주의 국학자 이마니시 료(今西龍<료>로 읽어야 함)였다.

이마니시 료는 차츰 기고만장하여 마치 그가 로마를 정복한 개선장군이양 경주땅에서 다음과 같이 목청을 돋웠다.(신라사연구新羅史硏究, 1930).

경주여, 경주여.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마음은 지금의 나의 심정이로다.
나의 로마는 눈앞에 있도다.
나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하노라.
慶州よ、慶州よ。
十字軍がイエルサレムを
望見せしむ心は今の我が心ならむ。
我がロ-マは目前にあり、
我が心臟は鼓動し始めぬ。

조선총독부는 이와 같이 난동하는 군국주의 신봉자 이마니시 료를 앞에다 내세워서 본격적으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말살에 광분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군국주의자들의 비호 아래 이마니시 료를서울에서 일제가 창설한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등을 밀어주었던 것. 이마니시 료는 자신의 반한 역사론인 단군고(檀君考)를 수없이 반복하여 다시 고쳐 쓰면서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를 극단적으로 부정했다.

그는 <단군고(1929)>의 서문에서 “조선에는 개국의 신인(神人)으로 단군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나라를 단군조선이라 칭하고, 이에 이어서 일어났다고 전하는 기자(箕子)·위씨(衛氏)의 두 조선을 모두 합하여 고조선(古朝鮮) 혹은 삼고조선(三古朝鮮)이라 칭하며, 이로써 이씨조선(李氏朝鮮)하고 구별한다. 그리하여 단군을 숭봉존신(崇奉尊信)하는 일이 근대에 급작스레 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조선 민족의 조신(祖神)으로 하여 단군교(檀君敎) 또는 대종교(大倧敎)로 칭하는 신도조차 생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단군 전설은 현재처럼 이루어짐이 결코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단군의 칭호는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단군을 전설 속의 신으로서 매도하면서 그것이 오래된 것도 아니라고 터무니없이 비방하며 이 글을 이어나가며 망발했다.

그의 작태는 에도시대의 극단적인 혐한주의자(嫌韓主義者)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의 현대판으로 부각된다.

이마니시 료는 <삼국유사>의 단군사를 일컬어 “사학(史學)의 자료를 이룬다기보다도 민담(民譚=민간설화)의 자료로서 취급해야 할 글이지만 달리 문헌이 없음으로 본인은 이 책에서 당시에 전하여 온 사실(史實)의 사금(砂金)을 채취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노라. 단군 전설 같은 것은 다른 사실(史實)과 유를 달리하며 오히려 민간 전설에 속하는 것을 가지고 이 책의 이 기사는 실로 이 책의 성질로 적응되는 것으로 친다”(檀君考)고 망발하며 조선상고사 말살에 박차를 가했다.

그 당시 함부로 날뛰는 이마니시 료를 가리켜 일본인들은 ‘조선 역사 개척자’라는 등 최고의 학자라고 황당무계하게 찬양하며 그의 조선역사 말살책에 너나없이 동조만 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들은 일제 군국주의자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우리 역사의 고사료를 수집한 기간은 1910년 11월부터 이른바 조작된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등 우리 역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해 써낸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 보면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다.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은 51종 20여만 권, 그 뒤 15년간 차압한 사료 4천 9백 50종이라는 엄청난 우리 역사서적 압수와 불태우는 분서(焚書) 행각은 필설로 이루 다할 수 없다.

더구나 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들까지도 모두 폭넓게 수집하였다.

일본 사학자 하라다 사카에루(原田榮) 씨는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회 구로이다 카쓰미(黑板勝美) 고문이 대마도로 건너가 사료를 탐방하면서 한국과 관계가 있는 다수의 고문서며 고기록 등이 대마도 번주(藩主)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들을 알고, 고문 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가져다 은폐 또는 불을 질러 분서시켰다([歷史と現代]1981)고 지적했다.

이른바 일본 고문서학의 확립자로 알려지고 있는 구로이다 카쓰미는 도쿄대학 교수와 일본고문화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조선 고문서 수집과 중요 서적을 불태우는 데 앞장섰던 조선총독부의 주구다.

두 말할 나위 없이 구로이다 카쓰미를 앞세운 일제의 우리 고사서 소각은 ‘단군조선’ 등 한국상고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그 밖에 일제의 만주 침략을 미화시킨 <만주발달사>를 썼던 조선총독부 수사관(修史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도 조선총독부의 <조선사朝鮮史> 편찬에 앞장섰고, 만주 건국대 교수가 되어 조선과 만주 역사 왜곡에 투철하게 앞장섰다.

또한 그 당시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 편찬하는 데 필요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사서 등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바로 그러한 일제의 처사는 머지않은 뒷날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된 우리 한국 내에서 ‘단군조선’에 대해 논란을 만든 불씨였다. 더구나 일제의 반한 역사교육에 편승한 일부 친일사학자들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반성은커녕 일제의 ‘단군조선’ 등 한국사 말살책을 계승했으며, 특히 <삼국유사>의 역사 말살 훼손 행위는 우리가 길이 기억해 둘 매우 중대 사항이다.

모름지기 한국인 역사학자라면 두 말할 나위 없이 이성(理性)으로 돌아와 냉철하게 우리 상고사를 다시 바르게 규명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어야 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일제 친일사관은 반성의 기미조차 없이 이른바 ‘주류사학’입네 사학계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란 것을 우리는 바르게 인식해야만 한다.

이마니시 료를 비롯하여 구로이다 카쓰미, 이나바 이와키치 등등 일제 군국주의 황국신도 국수주의자들은 본격적으로 손잡고 조선 상고사 말살에 밀착했다.

특히 이마니시 료는 “일본은 B.C. 660년에 천손(天孫) 신무천황이 천신(天神)의 아들로서 일본을 개국했다. 조선의 역사가 4천2백 년이 훨씬 넘는다는 것과 단군 신화는 황당무계하게 꾸며낸 조작된 역사다”(檀君考)라고 단군의 개국 이래의 조선상고사를 계속하여 매도하며 짓밟았다.

이마니시 료는 군국주의자들의 비호 아래 급기야 조선 왕도(王都)인 서울에까지 건너와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자처하면서 서울에서 이른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를 제멋대로 유린, 왜곡했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의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는 조선상고시대의 국가 기록을 말살하여 그것을 사람 이름으로서 바꿔치기했다.

즉 위서(魏書)의 단군왕검 건국 역사 기사를 인용한 <삼국유사> 본래의 기사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날조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박성수(朴成壽) 교수는 다음처럼 논증했다.

“현존하는 <삼국유사>의 원본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황의돈 교수가 서울대학교에 기증한 정덕본(正德本)이며, 다른 하나는 일인 이마니시 료(今西龍)가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에 남긴 정덕본(正德本)이라고 한다. 전자는 고려 충렬왕 1년(1275)에 일연이 쓴 고려시대의 원본이라 하며, 후자는 조선 중종 7년(1512)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조선시대의 정덕본이었다. 그래서 일인 이마니시 료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져가서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고쳤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필자가 최근 동경대학교 사료편찬소에 있는 <삼국유사>를 열람한 결과 모두 환국(桓國)으로 된 것을 확인하고 환인(桓因)이라 한 것은 원본이 아닌 것을 확인하였다.”(韓國의 仙道와 天孫文化 2010.10.4)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초대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다.

헌병 경찰제도로 무단통치를 강행했고,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말살시키는 데 앞장섰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으로 전임하고, 그 뒤 3.1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던 제2대 총독에 뒤이어, 1919년 8월 12일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것이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다.

사이토 마코토는 1922년 서울에 부임하자 곧이어 ‘조선사편수사업’을 지휘하며 한국 사람을 반쪽짜리 일본인(半日本人)으로 만들자는 소위 <교육시책>을 발표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전혀 알지 못하게 만들어서 조선의 민족혼과 민족문화를 상실시키도록 만들자.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선조(先祖)와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널리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야만 한다. 이리하여 조선인 청소년들로 하여금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켜주어 그것을 하나의 기풍(氣風)으로 만듦으로써 그 결과 조선 청소년들이 제나라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된다면 그들은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된다. 바로 그 때에 일본의 사적과 일본의 인물, 일본의 문화를 소개하면 조선 청소년들의 일본과의 동화(同化) 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바로 이것이 대일본제국이 조선인을 반쪽짜리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敎育施策).

이와 같은 조선역사 말살 행위는 그들의 1910년 조선국 침략 강점과 동시에 조선의 영구지배 흉책의 일환이었다. 여기에는 간교한 역사학자 기다 사타키치(喜田貞吉)의 <일선민족동원론>이 등장한다. 그 이후에 등장한 가나자와 쇼사부로의 <일선동조론>은 키다 사타키치의 이른바 <일선민족동원론>과는 성격이 다른 논거다. 고쿠가쿠인대학 가나자와 쇼사브로 교수의 <일선동조론>은 언어학을 바탕으로 주로 한일 양국어 관계와 한일관계사를 다소 논술했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에 앞서 가나자와 쇼사브로 교수는 일찍이 <일한양국어동계론>(1905)으로 비교 언어학 이론을 도출했다. 기다 사타키치의 <일선민족동원론>이라는 식민사관 도출을 위한 본격적인 역사왜곡 한일동조론과는 전혀 각도가 다른 언어학적인 한일 동조론이라고 본다. 이 점을 일반은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 홍윤기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석좌교수, 일본센슈대학 국문학과 문학박사, 한일천손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