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개국 역사를 면밀하게 검토한다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모두 단군의 후손이다”는 것을 이제부터 우리는 바르게 인식할 일이다.

일제는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했다. 맥아더 장군의 미군정하 국가가 된 것이다. 이에 저명한 사학자, 민족학자, 인류학자 등이 밝힌 일본 민족사 연구를 당당하게 공개했다. 좌담회와 연구회, 토론회 등도 잇따라 열었다. 그것은 역사학계에서 흡사 노도와도 같이 일본 국민에게 파장을 일으켰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패망은 일본 역사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학문의 자유시대를 활짝 열어준 것이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고대조선 단군왕검의 부왕 환웅의 ‘천손 강림(天孫降臨)’에 의한 단군개국 역사의 발자취며, 역시 천손 강림의 ‘가야(伽倻) 김수로왕의 건국’ 등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일본 고대 개국의 역사인 일본 천손 강림 개국신화’(日本 天孫降臨 開國神話)의 모태(母胎)였다고 하는 진솔한 역사론의 등장이었다.

더구나 그런 연구발표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처절한 패전 국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한때 하나의 큰 충격파가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단군 고조선 개국역사의 뿌리가 되는 중대한 내용이 일본 개국역사에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제치하까지 일본 사학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본 고대사학자들의 자아성찰이었다. 일본의 잘못된 ‘기원 2,600년’이라고 하는 조작한 황국신도(皇國神道)의 역사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었다.

군국주의자들은 일제 강점기까지 일본 제국(日本帝國)은 존엄한 ‘신(神)의 아들인 초대 진무천황으로부터 124대 인간신(人間神)인 쇼와천황(1926~1989)까지 만세일계의 천황이 국가를 다스려왔다’고 하는 황당무계한 황국신도를 내세웠다.

모든 국민을 음으로 양으로 탄압했다. 이렇듯 철저한 일본 국민에 대한 기만과 동시에 한국에 대해서는 소위 조선총독부가 교토제국대학 출신인 이마니시 료(今西 龍<류가 아닌 ‘료’로 읽음>) 등 사이비 역사학자들을 내세워 고조선 상고시대와 단군왕검의 역사를 철저하게 제거시키며 부정했다.

이들은 “일본은 한국 역사의 시작인 삼국시대보다 600년이 더 오랜 국가다”라고 외치면서 한일 양 국민을 함께 기만하고 유린했다.

도쿄도립대학의 오카 마사오(岡正雄, 1898∼1982) 교수 등 순수한 역사학자들은 고조선 상고시대와 그 뒤를 이은 단군왕검 역사에 대한 일제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진지한 논의를 계속했다. 또한 그들의 발표는 일본인들에게 충격과 동시에 새로운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 대표적 민족학자 오카 마사오 교수. 그는 1924년 도쿄제국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민속학자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 1875∼1962. 국수적인 민속학자. [定本柳田國男集] 전35권과 별권 5권, 1962∼1965)와 함께 민족학 연구지(硏究誌)인 [민족](民族)을 공동 편집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깨달은 바가 있어 야냐기다와 결별했다. 이어 새로운 과학적인 서구 학문에 의한 올바른 민족학을 배우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1929년 일본을 떠나 교통이 몹시 힘들었던 러시아 등 동유럽권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으로 유학했다.

그는 이 대학에서 빌헬름 쉬미트(Wilhelm Schmist) 교수와 빌헬름 코퍼즈(Wilhelm Koppers) 교수 밑에서 신학문으로서 민족학을 수학하고 마침내 1933년에는 이 대학에서 ‘민족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빌헬름 쉬미트와 빌헬름 코퍼즈의 공저, [민족과 문화](Vo..lker und Kulturen, Regensburg, 1924)는 오카 마사오 교수의 민족학 공부의 참다운 역사의 눈을 뜨게 한 진리의 지침서였다.

오카 마사오 교수의 박사 학위 논문 [옛 일본의 문화층(앞 학위론)]은 일본 선사시대의 고고학, 언어학, 종교학, 형질인류학, 신화학을 바탕으로 일본의 기층문화를 냉철하게 연구하고 규명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단군의 개국신화가 일본 개국신화의 모태였다는 신화학적인 고대 일본 역사의 시발(始發)을 당당하게 규명했다.

이 논문의 학문적인 경향은 당시 오스트리아 빈 학파 민족학의 연구 수법을 기본으로 답습한 선진적인 신선한 학구 방법이었다.

오카 마사오 교수는 그 후 1935년 일본으로 귀국해 황무지였던 일본 민족학 분야의 새로운 창설자가 되어 학계에 크게 공헌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확신을 안겨준 것은 서구의 이성적인 민족학 연구 방법론을 토대로 하여 일본 민족의 기원을 규명하는 일이었다.

그는 여기서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 민족의 주체가 되었다는 한일 양국 관계사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고대 조선의 단군개국 역사로부터 일본 민족 문화 발생 과정을 명확하게 규명했다.

첫째로 고황산영존을 주신으로 하는 하늘나라 ‘고천원’(高天原)의 신화 대목([일본서기])에서인데, 이 신화의 주요소의 하나는 천신 고황산영존이 손자(瓊瓊杵, 니니기)를 지상의 산봉우리로 내려 보내서 지상을 통치시키는 대목에서다.

이렇듯 종족의 조상신(祖上神)을 하늘에서 산 위로 내려 보내는 천손 강림(天孫降臨)을 모티브로 하는 신화는 고조선 단군개국 이전 환웅천왕의 시대와 육가야국(六伽倻國)의 조상이 구지봉(龜旨峰)으로 천손강림(天孫降臨)하는 개국역사이며 고구려 시조 주몽의 발자취 등에서도 조작된 일본의 개국역사의 발자취가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을 비교하여 규명한 것이다.

단군의 부왕 환웅천왕이 삼종의 보기(寶器, 천부경)와 풍백, 우사, 운사라고 하는 세 사람의 직능신(職能神)을 거느리고 태백산 산위의 단(檀)이라는 나무 곁으로 내려옴으로써 조선(朝鮮)이라는 국가를 열었다.

이것은 일본 개국신화의 경우, “고황산영존의 다른 이름인 고목신(高木神)의 이름이며 단군의 이름이 나무하고 연관이 있다”는 것과 함께 고황산영존과 니니기의 신화는 환웅의 개국의 발자취와 서로 형식의 유사(類似)가 매우 현저하다.

오카 마사오 교수는 “니니기가 천손 강림한 장소인 산봉우리의 이름을 ‘소호리’(ソホリ)라고 했는데, 이것은 조선어의 왕도(Seoul, 서울)의 뜻인 ‘소후루’(蘇伐, 신라의 왕도 소벌, 서라벌임, 필자 주) 혹은 ‘소후리’(所夫里, 백제의 왕도 부여의 다른 이름. 필자 주)와 똑같은 동일어(同一語)이다.
 
앞에서 밝힌 봉우리 ‘구지’(龜旨)는 규슈의 다카치호(高千穗) 봉우리인 ‘구시후루’의 ‘구시’(クシ)와 동일어이다”([日本民族の起源] 1958)고 그는 비교 연구해서 발표했다.

그런데 일본 역사책에 표기된 다카치호(高千穗) 봉우리로 일컫는 산봉우리는 일본 규슈에 유명한 봉우리만도 3곳이 있고 여러 학설이 혼미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이 지역을 두루 답사했다. 여기서 느낀 것은 그와 같은 개국역사의 명소를 “우리 고장이 옳다”고 각기 주장하는 것은 관광 수익 등 낙후된 지역사회 발전을 염두에 둔 주장이라는 것이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 등 권위 있는 학자의 견해다.

도쿄대학 사학과 오바야시 다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종족(種族)의 조상신(祖上神) 산상강림(山上降臨)을 모티브로 하는 신화의 발상지는 조선반도로부터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등(만주땅 이래. 필자주)으로 분포됐다고 볼 수 있으리라. 신은 하늘 위에 있고 그리하여 신이 수목(樹木, 나무)이며 산상으로 강림한다고 하는 신표상(神表象)의 종교 관념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대림태량 [日本神話の構造] 1987)

최초로 일본 민족의 기원을 신화를 통한 민족학으로서 명백하게 규명한 오카 마사오 교수의 논리 정연한 연구는 군국주의 탄압 아래 시달려왔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큰 충격인 동시에 또한 한일 민족 관계사의 선풍적인 신선한 화제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당시 누구도 오카 마사오 교수의 논거에 반론하거나 반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 저명 학자들은 오히려 그의 연구론에 공감하며 잇따른 일본 국가기원에 대한 고대사 관련 좌담회와 심포지엄 등이 열렸을 따름이다.

단군 개국역사와 더불어 일본 개국 역사의 바탕이 되었다는 가야 개국 역사에 대해,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도 오카 마사오 교수와 동일한 주장 아래 뒷날보다 더 구체적으로 다음처럼 상세하게 밝힌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 민족은 남방으로부터 왔느냐, 아니면 북방으로부터 왔느냐는 것이 예전부터 논의되어 왔다. 이 문제는 인류학자며 고고학자, 신화학자 등 다양한 각도로부터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일본신화의 중핵인 천손강림 신화에서는 어떤 것인가.”

이 이야기의 핵심은 ‘국토의 지배자인 해의 신(日神, 太陽神)의 자손이 높은 봉우리 꼭대기로 내려왔다’고 하는 대목에 있는데, 이러한 형의 이야기는 조선으로부터 내륙 아시아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 수많은 학자들이 지적하여 온 그대로다.

이를테면 조선의 단군 개국신화에서는 ‘하늘의 천신이 그 아들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고, 무리 3천을 거느려 태백산 정상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앞에 내려와서 조선을 개국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남조선 한족(韓族)인 가야에는 ‘성스러운 구지봉에서 촌장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을 때에 보라색 밧줄이 하늘에서 늘어져 왔다. 밧줄의 끝을 살펴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상자가 나왔고, 그것을 열어보니 해와 같은 황금알 여섯 개가 나타났다. 이 알을 이부자리 위에 놓았더니 키 구척장신의 남자 아이로 변했으며, 그가 즉위하여 김수로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설화는 [삼국유사]라는 조선의 옛 전설을 모은 책에 실려 있다. 앞쪽 이야기는 ‘고기(古記)에 이른다’라고 되어 있으며, 뒤의 것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이른다’고 쓰여 있다.

이와 같이 지배자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는 이야기는 몽고에도 있고, 이런 천손강림 신화는 결국 동질성의 것으로 간주하는 학자가 많다.

이를테면 오카 마사오(岡正雄) 씨에 의하면 유사성은 더욱이 신화 내부의 세부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한다. 즉 천손 니니기(瓊瓊杵)에게 신령(神令)을 내리는 것은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과 고목신(다카히무수히, 高皇産靈尊, 고황산영존신)이며 신과 나무와의 관련성이 나타나고 있는데 단군의 이름도 또한 단(檀)이라는 나무를 그 이름으로 삼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 제6의 1서에서는 ‘다카치호(高千穗) 봉우리의 소호리 산에 내려왔다’고 하는데, 조선어에서는 왕도를 소호리(서울, 필자주)라고 말한다.

또한 조선으로부터 내륙 아시아에 걸치는 유목민에게는 5를 단위로 하는 조직이 퍼져 있다.

고구려의 5부며 백제의 5부와 5방 등도 그런 것이지만 [일본서기]의 천손강림의 이야기에서도 5반서(五伴緖)가 천손을 뒤따르고 있다. 여기서 오카 씨는 이러한 북방적인 특색을 가진 신화의 전달자, 즉 황실(일본, 필자주)의 조상은 알타이계의 유목민 문화의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북방 기마민족이 4세기경에 일본으로 내습하여 와서 천황가의 뿌리가 되었다고 하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씨의 유명한 [기마민족국가](騎馬民族國家)도 그런 논거의 하나로서 이것과 똑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계속)

▲ 홍윤기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석좌교수, 일본센슈대학 국문학과 문학박사, 한일천손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