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살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습관적으로 대상의 외양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흔하게는 보통의 사물, 공산품의 디자인부터 자신과 관계 맺고 마주하는 인물들의 겉모습까지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외적인 상태에 영향을 받고 있을까.
작가 정윤영은 얼핏 가벼워 보이는 이 질문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 대상의 외양에 숨겨진 본질을 물었다. 작가 정윤영은 2021년 3회의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2년여 동안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제작한 신작들을 4월 27일부터 갤러리 호호(Gallery HOHO)에서 개최하는 개인전 《살결로 스며들어》에서 선보인다.

작가는 ‘살결’이 살갗의 결을 의미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생명의 흐름을 표현했다. 작업에서는 겉면에 안료를 뭉근하게 녹이듯이 안착시키는 ‘스며듦’이라는 형식을 적용했다. 미술대학 졸업 이후 10년여 동안 일관되게 탐색해온 작업의 주요 주제가 ‘식물 같은 상태의 신체’다. 작업의 구현 방식에는 어느 정도 변화가 생겼지만, 식물이 일부 매우 과감하게 화면 가득히 채우고 있다. 얼핏 식물인지 신체의 일부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로 여러 이미지가 화면 안에서 불규칙하게 교차한다. 감상자는 완결된 형태처럼 보이는 만개한 꽃의 형태, 꽃봉오리, 새파란 이파리, 줄기, 뿌리 등이 보여주는 생생함에 우선 호감을 느끼게 된다. 그 이면에는 감상자가 알아차리기 어려운 생성과 회복을 위한 식물의 몸부림이 자리한다.
작가는 차오르는 살, 흐르는 혈관, 끊임없이 요동치는 맥박과 같은 것들을 상상하며 붓질을 했다고 한다. 전통적인 서양 회화의 바탕 매체인 캔버스에 유화와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하고, 얇은 막과 같은 비단을 배접하여 그 겉면에 분채와 석채 등 전통 한국화 안료를 염색하듯이 안착시켰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습관적으로 이분화하여 구분지었던 안과 밖, 혹은 미와 추, 유한함과 무한함을 나누는 기준과 그 사이의 경계를 묻는 듯하다.
또한 아름다운 색채가 돋보이고 풍성한 미감이 주된 특징인 정윤영의 작품은 마치 씨앗이 발아하듯이 생체의 생경한 감각을 일깨운다. 작가는 동ㆍ서양의 회화적 특성을 넘나들며 섬세한 선묘가 돋보이는 밝은 색채의 추상 작품을 선보여 왔다. 화면 안에 부드럽게 스며든 색과 유기적인 형태, 식물의 줄기나 꽃의 단면을 연상시키는 회화 작품들은 ‘피고 지는’, 일종의 소멸과 회복을 반복하는 생명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반영한다.
칠했다기보다 배어들게 염색한 듯한 미묘한 효과는 대학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대학원 과정에서 회화를 전공한 작가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신체에서 파생되고 이어지는 색감들이 캔버스에 비단을 중첩한 표면 속으로 스며들며 기이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이는 곧 아름다움과 더불어 기이함이 반드시 반미학적인가라는 질문에 가닿는다.

"수술 직후의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의식조차 마비된 어지럼증 속에 가늘게 눈을 떴다. 도려낸 환부를 얄팍하게 덮은 앙상한 뼈와 거죽만이 남았다. (...) 서늘했던 온몸에는 온기가 돌아왔고, 살이 차올랐고, 생기가 돌았다. 암흑 속에서도 몸뚱어리는 한결같이 생성과 순환의 몸부림으로 버둥거리고 있었다."(“작업 노트”)
작가의 몸으로 느낀 존재의 연약함은 일종의 기억과 회복력으로 작업의 원동력이 된다. 서로 충돌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조형 요소들로 중첩된 작품은 생성과 회복의 에너지와 생명의 유동성을 품은 채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 관객들과 진솔하게 공유할 준비를 마쳤다.
정윤영 개인전 《살결로 스며들어》는 갤러리 호호 (Gallery HOHO,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연길 72, 2층)에서 5월 19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