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국새 대군주보. [사진출처=문화재청]
보물 국새 대군주보. [사진출처=문화재청]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2019년 미국에서 환수한 19세기 ‘국새 대군주보’를 비롯해 1946년 일본에서 환수한 대한제국기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 등 4과를 8월 24일 보물로 지정하였다.

조선 시대(대한제국기 포함) 국새와 어보는 총 412점을 제작하였다. 국새는 국가의 국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외교문서나 행정문서 등 공문서에 사용한 도장이다. 어보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으로,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거나 죽은 후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제작하여 국가에서 관리한다.

국새 가운데 이번에 보물로 지정한 ‘국새 대군주보(國璽 大君主寶)’는 1882년(고종 19년) 7월 1일 제작한 것이다.《고종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등에 외교관련 업무를 위해 고종의 명에 따라 1882년에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높이 7.9cm, 길이 12.7cm 크기로 은색의 거북이 모양 손잡이(귀뉴 龜鈕)와 도장 몸체(인판 印板)로 구성된 정사각형 형태의 인장이다. 보면(寶面)에는 구첩전(九疊篆)으로 대조선국의 대군주라는 의미를 지닌 ‘大君主寶(대군주보)’라는 글씨를 새겼다. 구첩전(九疊篆)은 글자의 획을 여러 번 구부려 쓴 전서체이다.

보물 대군주보 보면(寶面)(사진 왼쪽)과 도장 찍은 단면. [사진출처=문화재청]
보물 대군주보 보면(寶面)(사진 왼쪽)과 도장 찍은 단면. [사진출처=문화재청]

 

이것은 외교, 고위 관원 위임장, 사령장, 대군주의 명으로 반포되는 법령 등에 날인한 국새로, 2019년 12월 미국의 재미동포 이대수 씨로부터 기증받아 환수하였으며,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한다.

기증자인 재미교포 이대수 씨는 1960년대 미국으로 유학 후 줄곧 미국에 거주하면서 한국문화재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경매 등을 통해 문화재들을 매입하던 중 1990년대 후반에 이 두 유물들을 매입하였고, 최근 국새‧어보가 대한민국 정부의 소중한 재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고국에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으로 기증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국새 대군주보’를 만든 배경에는 19세기 말 급변하던 국제정세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선왕실의 고민이 함께 담겨 있다. 당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앞두고 고종은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國旗)와 국새(國璽)를 함께 만들도록 명하여, 무위영(武衛營, 고종대 궁궐 수비를 맡은 관청)이 호조의 예산을 지원 받아 완성하였다. 즉, 이 국새는 고종이 대외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표시하는 용도로 국가 간 비준이나 공식 문서에 자주독립국을 지향하는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총 6과의 국새를 만들었는데, 이 ‘국새 대군주보’만 유일하게 지금까지 전한다.

이전까지 조선은 명과 청에서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국새를 받아 사용했으나, 고종의 명으로 ‘대(大)조선국’의 ‘대군주(大君主)’라는 글씨를 새긴 ‘대군주보’를 새롭게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대군주보의 공식적인 사용 시기는 1882년 제작 이후 1897년까지로 파악되었으며, 외국과의 통상조약 업무를 담당하는 전권대신(全權大臣)을 임명하는 문서(1883년)에 실제 날인한 바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새롭게 제정된 공문서 제도를 바탕으로 대군주(국왕)의 명의로 반포되는 법률, 칙령(勅令), 조칙(詔勅)과 관료의 임명문서 등에 사용한 사실도 확인하였다.

1897년 10월 11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국호(國號)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국새도 ‘대한국새(大韓國璽)’로 바꾸었다. 이에 1899년 1월부터 ‘대한국새’를 사용하면서 ‘대군주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국새 대군주보’는 이처럼 갑오개혁을 전후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방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유물이다. 또한, 서체, 형태 재질, 주물방식 등 대한제국 이전 고종 대 국새제작 방식이 담겨진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알려진 유물이라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