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청이 8월 24일 보물로 지정한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는 모두 대한제국기(1897~1910)에 제작한 국새이다.

국새 3과 모두 1897년(광무 1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백성에게 알리기 위한 문서 또는 임명장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대한제국 국새 중 일부로, 왕실 인장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보장(寶匠) 전흥길(全興吉) 등이 주도해 제작하였다.

보장 전흥길은 1851년부터 1897년까지 47년간 금보(金寶) 제작에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 장인. 전수명(全壽命), 전억만(全億萬), 전일만(全一萬) 등과 더불어 인장 제작 분야에 전문적 가업(家業)을 계승해 19세기 대표적 보장(寶匠) 가문을 형성하였다.

이 국새 3과는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6개월 후인 1911년 3월 약탈되어 일본 도쿄에 있는 궁내청(宮內廳)으로 들어간 수모를 겪기도 했으니 비운의 국새들이다.

광복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궁내청에서 환수해 총무처(1940~1960년대 국무총리 소속 아래 설치되었던 중앙행정기관)에 인계한 후 1954년 6월 28일 총무처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인계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보물 국새 제고지보. [사진=문화재청]
보물 국새 제고지보. [사진=문화재청]

 

 

그런데 1946년 미군정으로부터 환수 받은 6과의 국새는 1949년 총무처 주관으로 특별전에서 공개한 후 6․25 전쟁 동안 모두 유실되었다. 그 뒤 경위는 알 수 없으나, 1954년 ‘제고지보’, ‘대원수보’, ‘칙명지보’ 3과가 경남도청 금고에서 발견되었고 그 해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1965.3.20일자 동아일보 기사)

보물 국새 제고지보

3과 중 시기가 가장 이른 '국새 제고지보(國璽 制誥之寶)'는 1897년 9월 19일 완성된 인장이다. ‘제고(制誥)’는 ‘황제의 명령’을 뜻하기 때문에 이 국새는 조선왕실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황제로 칭한 대한제국에서만 사용한 국새이다.

형상을 보면 손잡이는 용 모양이고 등은 위로 솟구쳐 반원형이다. 용의 정수리에는 점문(點紋, 점 모양의 무늬)과 비늘이 있고, 머리에는 녹각뿔이 솟아있다. 코에는 여의두문(如意頭紋, 일종의 구름형상의 문양)이 새겨졌고, 입을 벌리고 이빨 2개가 아래로 돌출되었으며, 입 주위로 상서로운 문양이 새겨있고 입안에 여의주를 물고 있다. 상상의 동물을 매우 생동감 있게 자세히 묘사하였고 도금(鍍金)이 벗겨지지 않아 황금빛이 잘 남아 있다.

이 ‘국새 제고지보’는 대한제국 국새로서 조선 왕실 어보(御寶)와 형식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에서 시대적 변화를 보여준다. 조선왕실 어보가 거북형 귀뉴(龜鈕)인데 반해 대한제국 국새는 용뉴(龍鈕, 용모양의 손잡이)인 점, 용뉴의 받침대를 마련했다는 점, 보면(寶面)의 크기가 조선왕실 보인(寶印)에 비해 사방 2cm 정도 크다는 점, 보면의 글씨체가 조선 어보의 구첩전(九疊篆)에서 소전(小篆)으로 바뀐 점 등 여러 면에서 대한제국기 국새의 조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국새 제고지보’는 대한제국기 황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며, 공예, 서예, 전각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 수준의 문화적 역량이 담긴 문화재다. 미확인된 대한제국 국새의 발견을 위한 근거자료로서의 가치도 크기 때문에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물 국새 칙명지보

'국새 칙명지보(國璽 勅命之寶)'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문서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대한제국 국새 10과 중 하나로, 1898년 윤3월 19일에 제작하였다.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제의 나라에 걸맞은 새로운 국새를 제작하였고 그 결과 1897년 9월 17일~19일 동안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命之寶)’, ‘명헌태후지보(明憲太后之寶)’, ‘황후지보(皇后之寶)’, ‘황태자보(皇太子寶)’, ‘황태자비지보(皇太子妃之寶)’ 10과를 완성하였다.

보물 국새 칙명지보. [사진=문화재청]
보물 국새 칙명지보. [사진=문화재청]

 

 

이번에 보물 지정된 것은 1897년 9월에 제작된 ‘칙명지보’가 아닌 이듬해 1898년 윤3월 19일에 좀 더 작은 크기로 만든 것이다. 용뉴와 보신(寶身)으로 구성되었고 발톱을 세우고 웅크린 형상, 몸통 전체에 덮인 비늘 문양, 머리에 솟은 뿔, 얼굴 주변의 상서로운 기운 등 신비감과 동시에 제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듯하다.

보물 국새 대원수보

'국새 대원수보(國璽 大元帥寶)'는 1899년(광무 3) 6월 22일 대한제국이 육해군을 통솔하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대원수보(大元帥寶)’ 1과, ‘원수지보(元帥之寶)’ 1과, ‘원수부인(元帥府印)’ 1과를 만든 것 중 하나이다. 대원수(大元帥)는 원수부의 우두머리로, 국가의 전군(全軍)을 통솔하는 최고 계급을 지칭한다. 군인 임명서 등에 날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용모양의 손잡이인 용뉴(龍鈕)와 유대(鈕臺, 얕은 받침), 보신(寶身)으로 구성되었고, 서체는 소전체로 단정하고 정갈하다. 시간이 흘러 일부 변색되거나 탈색된 부분이 있지만 제작 당시의 원형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용뉴와 보면(寶面)의 문자 또한, 훼손 없이 잘 남아 있다.

보물 국새 대원수보. [사진=문화재청]
보물 국새 대원수보. [사진=문화재청]

 

용뉴의 받침을 갖춘 대한제국 국새로서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고, 고종황제가 군사적 실권을 갖고 강력한 군사력 강화를 통해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보물이 된 대한제국 국새 3과는《대례의궤(大禮儀軌)》등 관련 문헌에 형태와 재료, 치수 등이 상세히 수록되었고 당시 발행된 공식문서에 실제 사용된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외세로 인해 혼란했던 시기에 국가의 운명과 수난을 함께 겪은 역사상징물이자 희소성이 크다는 면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