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홍익민주주의라고 할 때 우리 역사에서 홍익민주주의의 정신을 유추할 수 있는 정치제도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상고사 관련 역사서적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의 이념이 반영된 정치제도를 만들어서 운영하였을 것이라고 당연히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역사서적을 읽으면서 눈여겨 본 것은 우리 상고사에 나오는 화백제도이다. 강단사학에서는 만장일치의 의사결정구조를 가진 정치제도라고 하면서 신라의 화백제도라고 소개하는데 과연 ‘신라’의 화백제도일까? 화백제도의 근원을 따져 보기 위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신라에서 화백제도를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신라의 화백제도라고 하는지 궁금하다.

법무법인 클라쓰 곽영철 고문변호사
법무법인 클라쓰 곽영철 고문변호사

인터넷 검색을 하면 중국 사서에 신라의 화백제도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사서인 《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에는 “其有大事 則聚群官詳議而定之(기유대사 즉 취군관상의이정지), 국가 중대사가 있으면 뭇 관이 모여 상의하여 결정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신라전’(新羅傳)에는 “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사필여중의 호화백 일인이즉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사람이 모여 의논하였으며 이를 화백이라 불렀으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할 경우 부결되었다”라고 하여 만장일치제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중국사서가 아닌 우리의 사서에 의하면 신라시대 훨씬 이전에 이미 화백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고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신시배달국 시대에도 화백제도를 이미 시행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서 기록을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자.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삼성기전》 하편(三聖紀全 下篇)에 보면 “桓雄天王... 與衆議一歸爲和白...(환웅천왕 여중의일귀위화백)” 즉 “환웅천황께서 백성의 의견을 모아 하나로 통일하는 화백제도를 두었다”고 분명히 기록하였다.

또 고려시대 문신 행촌 이암(李嵓, 1297~1364)이 쓴 《단군세기》를 보면 “6세 단군 달문 재위 35년(단기285년, 서기전 2049년)에 달문 단군이 和白爲公(화백위공)... 즉 화백을 공적인 제도로 삼을 것을 지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문신 이맥(李陌, 1455~1528)이 지은 《태백일사》 제5 소도경전 본훈에도 “신시태평시대 때 ... 和白爲公(화백위공) 즉 화백하여 공정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發政莫先於和白...(발정막선어화백)”이라 하여 정치를 시행함에는 화백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보통 아는 신라의 화백제도는 고조선시대, 신시배달국 시대부터 이미 시행되고 있었던 정치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때 비로소 시작된 정치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사서의 기록에 화백제도의 기원이 명확하게 밝혀졌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신라의 화백제도라고 명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근거가 불분명한 중국 측 사서만을 보고 신라의 화백제도라고 고집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역사의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홍익민주주의의 기원을 정확히 인식하고 홍익민주주의의 개념과 그 안에 담아야 하는 구체적인 모습들을 채워나가는 일이다. 이를 테면 대화와 타협의 정치, 소수의견 존중,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직업민주주의 등 현실정치에서 적용할 수 있는 실천 지침들을 얼마든지 개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