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국학원은 10월 31일(토) 평택문예회관에서 ‘평택의 국학자, 안재홍의 역사인식과 민족사학의 미래’를 주제로 경기도의 국학 전통을 계승하고 친일잔재 청산의 방향을 논의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2020경기도 일제잔재청산공모사업인 '일제잔재청산과 민족정기바로세우기를 위한 학술대회'로 경기국학원과 동북아고대역사학회가 주관하고, 경기도의회 친일잔재청산위원회와 (사)국학원이 후원했다.

경기국학원은 10월 31일(토) 평택문예회관에서 ‘평택의 국학자, 안재홍의 역사인식과 민족사학의 미래’를 주제로 경기도의 국학 전통을 계승하고 친일잔재 청산의 방향을 논의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사진=경기국학원]
경기국학원은 10월 31일(토) 평택문예회관에서 ‘평택의 국학자, 안재홍의 역사인식과 민족사학의 미래’를 주제로 경기도의 국학 전통을 계승하고 친일잔재 청산의 방향을 논의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사진=경기국학원]

중원대 김철수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학술대회에서 먼저 제1주제로 “평택 국학자, 민세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사학”을 발표한 김광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는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1891-1965)은,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의 순수한 우리민족 고유의 학, 곧 국학을 토대로 민족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역사인식 및 사상,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려고 분투노력하였던 해방 전후 시기의 대표적 인물이다.”며 “민세는 일제강점기 무려 9차례 총 7년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고 일제에 일관되게 저항하였던 독립운동가, 언론인, 민족사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국학자이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연구방법 면에서 민세는 당시 최신 인류학이론이었던 Morgan의 고대사회이론을 활용하고, 또 비교언어학 및 문헌고증의 방법을 사용하면서, 단군, 단군의 건국과정, 그리고 한민족의 형성 등 한국 고대사는 물론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의 한국 고유사상의 정립을 시도하였다.”며 “그에 의하면, 단군의 건국 연대와 기일은 기원전 2333년 10월이고, 국호 조선은 ‘하늘이 주신 나라’라는 의미이다. 물론 그가 저술한 상고사의 내용과 설명에 좀 더 정교한 보강 연구나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세가 한민족의 상고사와 단군, 그리고 언어학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학문적 이론과 사상을 전개한 것은 그가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국학자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특히 민세는, 언어고증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선인들의 생활문화, 특히 우리의 말을 중심으로 한민족 고유의 역사와 철학을 탐구, 이를 ‘조선정치철학’으로 정리해 냄은 물론, 이를 자신의 정치사상의 토대로 삼았다.”며 “상고사 관련 문헌과 자료들이 대부분 유실 및 훼손된 상황에서 언어고증학이라는 연구 방법을 크게 활용한 그의 노력은 주목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민세는 한민족 최초의 철학원리로 비, 씨, 몬을 제시하였고, 일부터 십까지, 그리고 백, 천, 만, 억 등 숫자에 관한 우리말들로부터 우리 고유의 정치사상을 도출해 내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일과 이와 삼으로부터 한의 큰 원리와 우주 생성의 삼원을 설명해 내고, 개전일체의 국가관으로 요약되는 「사 출생」, 다사리의 통치 원리로 요약되는「오 섭리」, 무한한 창조와 영속하는 변화를 뜻하는 「육 지속」, 우주와 인간적 삶의 대도의 종합을 의미하는 「칠 사위」로서 우리 민족 고유 사상의 기본 매듭을 지은 다음, 민세는 이를 토대로 팔과 구에서 개합지양과 종합회통의 원리를 각각 도출하고, 이 둘을 합쳐 동서양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역리로서 자신의 정치사상의 바탕이 되는 개합회통론을 제시하였다.”라 면서 “십에서 개합회통된 일과 사물이 무한 전개되고 발전하는 원리를 이끌어 냄은 물론, 모든 것을 종합하여 홍익인간의 대도와 만민공생하는 다사리의 이념을 최고의 선이자 정치적 이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고유의 정치사상을 토대로 민세는 우리 민족이 실현해 나가야 할 정치 이념 및 비전으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제시하였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만민공생의 다사리 민주 정치공동체란 정치 균등만이 아니라 경제와 교육의 균등이 이루어짐은 물론, 나아가 봉사와 의무의 균등까지 구비된 정치공동체를 말하는데, 민세는 이를 신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민세는 이러한 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 개합회통의 정신 하에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과 협동을 존중하는 민족자존의 주체적 민족주의를 신민족주의라 명명하였다.”고 소개했다.

이어 제2주제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역사인식에 나타난 선도적 역사인식”을 발표한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은 “안재홍은 한민족 고유의 역사와 사상을 탐구하여 이를 자신의 정치사상의 토대로 삼았으므로 해방 후 전개된 그의 정치사상은 민족주의사학의 계승이라는 면을 지니고 있었다.”며 “안재홍은 민족을 혈연적·지역적·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운명공동체로 규정하였고, 같은 조상(고대 사회에서는 동일한 씨족공동체)에서 출발하였으리라고 추단되는, 공동한 조상에서 물려받은,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생활공동체로 보았다. 민족과 민족의식은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선진 자본주의의 침략적인 민족주의나 배타독선적인 파시즘의 민족주의와는 달리 민족自存의 생존협동체로서의 민족주의는 원본적原本的인 이념으로 거룩한 것이다. 해방 조선은 민족주의를 요청하고 있으나 그것은 신민족주의이다.”고 설명했다.

소대봉 정책위원은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의 중심 사상은 만민공생이었고, 이는 1937년에 쓴 「기자조선고」와 「신라건국사정고」에서 찾은 「다사리」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며 “해방 공간에서의 최우선 과제를 통일민족국가의 건설로 삼은 그는, 고유문화·사상 속에서 미래를 전망하고 설계하는데 필요한 사상·이념적인 단서들을 찾고 이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로 정리하였다.”고 밝혔다.

이어 소대봉 정책위원은 “안재홍이 고유의 역사·사상 연구에 천착하여 찾아낸 ‘홍익’과 ‘다사리’ 사상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화에 대한 사대·모화의 유교나 서구 사상의 관점이 아니라 ‘한국선도’의 관점에 입각해야 한다”며 “안재홍이 고유의 문화·사상인 한국선도 속에서 받아들인 사상·이념적인 단서들은 일삼사상, 홍익인간사상, 「신지비사」 속의 균형흥방론 등이다.”라고 강조했다.

소대봉 정책위원은 1970년대 이후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어 왔지만, 안재홍이 고유의 역사·사상·문화에서 신민족주의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했다는 것에는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안재홍이 찾아낸 고유의 사상인 「다사리」, ‘홍익인간’에 대해 구체적으로 천착한 연구는 별로 없다고 전제하고 “‘단군민족주의’를 주창한 정영훈은 안재홍의 고유셈말 해석과 민족 고유사상에서 도출한 삼일신사상, 홍익인간사상, 「신지비사」 속의 균형흥방론 등에 천착하여 ‘신민족주의’ 정치이론을 설명해 낸다. 그러나 그의 ‘단군민족주의’는 민족주의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에 가까운 평가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단군과 결합된다고 하여 ‘팽창·공격·배타·초월’로 왜곡 규정된 민족주의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영훈은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홍익인간사상의 상한선을 단군으로 보았으나, 1990년대 백두산 서편 천평 지역에서 발굴된 만발발자 유적으로 단군사화나 선도사서의 환웅천왕 기록이 사실과 부합符合함을 웅변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홍익민족주의’로 새롭게 이름 짓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고 결론지었다.

경기국학원의 ‘평택의 국학자, 안재홍의 역사인식과 민족사학의 미래’ 학술대회. [사진=경기국학원]
경기국학원의 ‘평택의 국학자, 안재홍의 역사인식과 민족사학의 미래’ 학술대회. [사진=경기국학원]

 

제3주제로 “현대 국학운동의 방향 전환과 민족사학의 미래, '선도사학'”을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 ‘선도수련문화’의 대중화‧세계화 추세 속에서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한 현대 국학운동의 동향을 살피고 특히 그 이론적 기반이 되는 민족사학이 선도사학으로 변화해가는 추세를 조명했다.

정 교수는 “‘한국선도’는 한국사의 출발점에서 시작된 고유의 사유체계로서 수련법에 기반하고 있으며 상고 이래 줄곧 한국사상의 원류로서 기능하여 왔다.”며 “선도 전통은 삼국 이래 점차 쇠퇴되어갔지만 민족사상‧문화의 원류로서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기에 선도전통이 민간의 저류적 흐름으로 잠복하다가도, 전쟁 등으로 국제 질서가 깨어지고 민족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는 위기상황이 발생할 경우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의 뿌리로서 선도 전통에 대한 자각이 되살아나고 이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선도운동(선도실천운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회운동으로서의 선도실천운동은 대체로 ‘단군’의 상징성을 갖기에 ‘단군운동’으로 이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 교수는 “1970년대말‧1980년대초 이후 선도가 선도수련문화의 형태로 부흥하면서 선도실천운동으로서의 단군운동 또한 되살아나게 되었다. 이 시기 선도가 민족종교의 형태가 아니라 현대화된 선도 氣學 위에 입론한 선도수련법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기에 단군운동 또한 기왕의 단군운동과 달리 선도 기학적인 의미나 선도수련법과의 관련성이 분명하게 제시되는 모습이었다.”며 “현대의 단군운동은 크게 1980‧90년대의 ‘한문화운동’ 및 2000년대 이후의 ‘국학운동-지구인운동’으로 나뉜다. ‘한문화운동’의 경우, 이시기 선도가 민족종교의 형태에서 선도수련문화의 형태로 달라졌기에 한문화운동의 접근법도 기왕의 단군운동과 달리 단군을 종교적 신앙 대상이 아니라 내적 수련을 위한 전범으로 바라보았고 개천절‧광복절 행사 또한 이러한 성격의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제천수련제의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1998·99년 ‘단군상 설립운동’으로 대변되듯이 한문화운동을 통해 1960‧70년대 이래 퇴색된 선도나 단군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었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정 교수는 “2000년대 이후 선도가 국내를 넘어 세계로 확산되면서 단군운동의 전개 양상 또한 달라져, 한문화운동은 국내 차원으로는 ‘국학운동’, 세계 차원으로는 ‘지구인운동’으로 분리·병행되었다.”며 “2000년대 이후 국학운동이 국학운동의 차원을 넘어 지구인운동으로 확대되면서 근대 이후 국학운동이 기반해 왔던 민족사학의 방향도 달라져가게 되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민족사상의 내용성이 한국선도로 분명한 자리를 찾아가게 되었고 민족상고사에서 연원하는 민족문화의 내용성도 선도문화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민족사학이 선도사학으로 그 본령을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 교수는 “1980년대 이후 동북 지역 상고문화의 등장과 함께 동북아 상고문화의 원형인 ‘맥족-배달국-선도문화’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고려 중기 이래 오랜 세월 동안 한국사에 덧씌워져 왔던 중화사관, 또 일제시기 중화사관 위로 재차 덧씌워졌던 식민사관이 1천여 년 만에 드디어 그 존립의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며 “또한 한국 상고 이래 ‘국학’이었던 선도, 또 선도에 입각한 주체적 역사인식이었던 선도사관이 되살아나면서 중국이나 일본의 패권주의적 역사인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초 민족사학이 등장한 이래 백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21세기 한국 민족사학의 새로운 미래로서 선도사학의 등장을 목전에 맞이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경기국학원은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방역수칙을 준수하고 이날 학술대회를 유튜브로 중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