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국학원은 오는 10월 31일(토) 평택문예회관에서 경기도의 국학 전통을 계승하고 친일잔재 청산의 방향을 논의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는 2020경기도 일제잔재청산공모사업인 '일제잔재청산과 민족정기바로세우기를 위한 학술대회'로 경기국학원과 동북아고대역사학회가 주관하고, 경기도의회 친일잔재청산위원회와 (사)국학원이 후원한다.

이날 ‘평택의 국학자, 안재홍의 역사인식과 민족사학의 미래’를 주제로 제1주제 평택 국학자, 민세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사학(발표: 김광린(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제2주제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역사인식에 나타난 선도적 역사인식(발표 :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제3주제 현대 국학운동의 방향 전환과 민족사학의 미래, '선도사학'(발표: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을 각각 발표한다.

국가보훈처의 자료에 따르면 민세 안재홍(安在鴻, 1891. 12. 30~1965. 3. 1)은 경기도 진위군(현 평택) 고덕면 두릉리에서, 순흥 안씨(順興安氏) 윤섭(允燮)과 남양 홍씨(南陽洪氏) 사이의 8남매 가운데 2남으로 출생하였다. 1897년부터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7년부터는 이른바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 해에 서울의 황성YMCA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당시 YMCA는 월남 이상재, 한서 남궁억, 좌옹 윤치호 등이 출입하던 곳이었으므로, 안재홍은 긍지를 가지고 여기서 3년간 신학문을 배웠다. 이때 역사학자이자 항일지사로서 늘 존경하고 흠모하였던 11세 연상의 단재 신채호를 만났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안재홍은 구국의 뜻을 품고 9월 일본 유학에 올라 1911년 9월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10월에는 도쿄에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 전체를 통괄하는 중추기관으로서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스물한 살이 되던 이 해에 안재홍은 장대한 기개와 포부를 드러내 ‘민중의 세상’이라는 뜻으로 '민세(民世)'라는 아호(雅號)를 지었다. 

1912년에는  일본 동경(東京)에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朝鮮留學生)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안재홍은 1913년 1월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주필로 재직할 때 신간회(新幹會)의 총무간사에 피임되어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8년 12월 광주(光州)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정치단체인 신간회와 협동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있으면서 조선민중대회(朝鮮民衆大會)를 열고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되었다.

이 무렵 안재홍은 고대사 연구에 집중하였는데 그 이유는 고대가 한민족의 형성과 영토의 확장 등 민족의 번영기를 구가하던 때였으므로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이 가장 심하게 왜곡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안재홍은 ‘단군’이라는 말조차 불온시되던 시기에, 단군을 말살한 식민주의사학을 비판하며 기자동래설을 부정했다.

1934년 들어 위당 정인보와 함께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하기 시작하면서 다산 정약용과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함경남도 홍원(洪原) 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정부수립에 이바지하였다. 『조선상고사감』(상·하)(1947, 1948)와 『조선통사』를 펴냈다. 6·25당시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경기국학원은 오는 12월 5일(토) 오후 1시 ~ 6시 경기도 고양 교육지원청 대강당에서 ‘일제잔재청산과 민족정기바로세우기를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