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서울역 앞에서 65세의 노인이 제3대 조선총독부의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고자 그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당시 일본 경찰과 일본군 장교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전한 강우규 의사의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강우규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이 지난 2일, 이북5도청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 2일, 서울 이북5도청 강당에서 '강우규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사진=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 2일, 서울 이북5도청 강당에서 '강우규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사진=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장원호) 주관으로 열린 이날 기념식에는 박삼득 국가보훈처장, 허헌 광복회 부회장 등 내외빈을 비롯해 각계 인사와 시민 300여 명이 참석했다.

장원호 기념사업회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100년 전 강 의사님의 의거는 항일운동 정신의 표상이 되었고, 의열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본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강 의사의 활동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를 꾸준히 열고 동만주와 러시아, 하바로스크 등 넓은 지역에서 흩어져 있는 강 의사의 자료를 수집해 독립정신을 이어나가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이어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은 “강우규 의사의 의거로 지축을 흔들었던 그 당시의 폭음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고하고 꺾이지 않는 기상과 깨어있는 민족의식으로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울림이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계승되어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기념사를 전했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이 지난 2일, 이북5도청 강당에서 열린 '강우규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이 지난 2일, 이북5도청 강당에서 열린 '강우규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이후 암울했던 일제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의 아픔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령의 나이에도 독립정신을 실행했던 강 의사의 행적을 담은 기념공연이 펼쳐졌다. 행사 막바지에는 참가자들 모두가 '홀로아리랑'을 부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정신을 기렸다. 

한편,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난 강우규 의사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이 집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다르고 의기 또한 대범하여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으며, 청소년기 시절에는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다.

1883년 함경남도 흥원으로 이주한 그는 한약방을 경영하며 인술(仁術)을 베풀고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우며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국운은 계속 기울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맞이하고 말았다. 당시 강 의사는 50대 초반이었으나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 두도구로 망명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며 박은식·이동휘·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했다.

하지만 정세는 악화되어 갔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일제의 눈치를 보던 러시아 정부는 연해주 일대의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이에 강우규 의사는 1915년 우수리강 대안의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만주에 위치한 이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강 의사가 평소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구상할 때 눈여겨 본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한민족을 새롭게 발흥시킨다는 의미로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노력으로 신흥동은 불과 1년 만에 100여 호의 한인마을로 성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강 의사는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한인들에게 동포애와 민족적 일체감을 심어주었으며, 신흥동을 노령과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집권한 레닌 정부는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공언했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의 분위기 속에 국제사회에는 민족자결주의와 인도주의가 크게 부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정세 변화를 파악하고 민족 역량을 결집하여 일으킨 것이 1919년 3‧1운동이다.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번져 갔다. 해외로도 퍼져나갔으며, 강 의사가 건설한 신흥동은 물론 한인 동포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선생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 광동학교 학생들과 동포들을 모아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요하현 일대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동휘, 김치보, 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국제정세가 점점 비관적으로 바뀌어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열강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해 5월을 넘기면서 3‧1운동은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에 일제는 무단정치의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신 새로운 총독을 임명해 ‘문화통치’로 식민정책을 변경하는 술수를 꾀하려 했다.

그러나 강 의사는 이 같은 일제의 정책 변화는 3·1운동 무마책에 불과하며, 나아가 우리나라와 민족을 영구히 식민지화하기 위한 술책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에 민족의 독립, 동양 평화, 세계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와 정의 인도를 위해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고, 새로운 조선총독의 처단을 결심했다.

신문 보도를 통해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신임 총독에 임명되어 1919년 9월 2일에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 의사는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서 환영행사를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선생은 민족의 분노와 독립의 염원이 담긴 한발의 폭탄을 힘껏 던졌다. 사이토를 폭살하지는 못했으나 일제 식민통치자들과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의거 후 가까스로 피신했지만 친일파 경찰 김태석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하다 재판을 받고 이듬해 1920년 11월 29일에 순국했다. 청년 같은 노객이었던 강우규 의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대한독립의 의지를 세계 만방에 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