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98년 전인 1920년 11월 29일, 새롭게 부임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당시 65세 고령의 애국지사가 순국한 날이다. 비록 총독 처단은 실패했으나, 일본 경찰과 일본군 장교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전달한 그는 바로 왈우(曰愚) 강우규 의사이다.

왈우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장원호, 이하 기념사업회)는 지난 29일, 서울 이북5도청 통일회관 대강당에서 ‘왈우 강우규 의사 순국 98주기 추도식’을 개최했다. 추도식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과 장원호 기념사업회장 등 각계 인사 130여 명이 참석했다.
 

왈우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 29일, 서울 이북5도청 통일회관 대강당에서 ‘왈우 강우규 의사 순국 98주기 추도식’을 개최했다. [사진=왈우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왈우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 29일, 서울 이북5도청 통일회관 대강당에서 ‘왈우 강우규 의사 순국 98주기 추도식’을 개최했다. [사진=왈우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장원호 기념사업회장은 “강우규 의사님은 풍전등화에 처한 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의식에 불을 지피고, 그 불씨로 대한독립만세 운동이 전역으로 다시금 들끓게 했다. 의사님의 애국애족정신의 마음을 새기며 영전 앞에 머리 숙여 그 정신을 다시 한 번 기리고자 한다.”고 추모사를 전했다.

이어 추도식에 참가한 이들 모두가 강우규 의사의 영전 앞에 헌화 및 분향을 했다. 추도식은 평남부녀 합창단의 추모가 합창으로 마무리 되었다. 
 

지난 29일, 왈우 강우규 의사 순국98주기 추도식에 참가한 이들이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사진=왈우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지난 29일, 왈우 강우규 의사 순국98주기 추도식에 참가한 이들이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사진=왈우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평안남도 덕천 출신인 강우규 의사는 가난한 농가에서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나 집에서 자랐다. 이후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망명해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뜻 있는 동료들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의논했다. 1915년 요하현(饒河縣)으로 거주지를 옮긴 뒤에도 블라디보스토크를 자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꾀했다. 그리고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1917년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했다.

강 의사는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자신이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노인단의 길림성지부장이 되어 조직적인 시위운동도 전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1919년 5월 노인단원 이발, 정치윤 등 5명의 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와 시위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에 분개한 강우규 의사는 노인단 대표로서 국내에 잠입해, 일본총독을 비롯한 핵심인물 암살을 결심했다.

그 해 7월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해 원산으로 들어온 그는 거사계획을 세우고 8월에 서울로 잠입했다. 거사 당일인 9월 2일, 일본 신임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마차에 오를 때, 강우규 의사는 품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으나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경찰과 일본군 장교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나온 그는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11월 29일 사형을 당한 그는 형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도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