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행정부 후원 나라사랑 현장학습으로 7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다녀왔다. 대일항쟁기에 독립투사들을 가두웠던 곳. 너무나 가슴 아픈 장소이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마주보는 시간이었다. 110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가하여 어느 때보다 뜨거운 관심을 보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현장학습. 학년별로 조를 짜고 학부모도 한 조를 구성하여 눈높이에 맞는 해설로 진행했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는 요즘 아이들에 어떤 배움의 장이 될까? 서대문형무소를 세운 1908년을 전후한 국제정세와 국권을 빼앗긴 과정을 들은 학생들은 다른 나라의 도전에 대비해 항상 준비하고 나라의 힘을 키워야겠다고 이야기한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먼저 일어섰던 의병들. 우리 역사속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일어섰던 백성의 힘과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던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 그 분들의 가족, 그 분들이 남긴 글, 그 분들의 삶을 들으니, 책 속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분들이 내 이웃처럼 가깝게 느껴지며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서대문형무소 현장을 찾은 이들만 누리는 덤이다. 특히 서대문형무소 최고령 독립 운동가이셨던 강우규 의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숙연해지고 비장한 마음이 된다. "이 나이 먹도록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 없음이 오히려 부끄럽다. 조선의 청년들이 나의 모습을 보고 조금이라도 깨어나기를 바란다."

수형기록표가 사방에 붙어있는 방에서 학생들은 하나하나 독립 운동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분들에게 감사한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수감 전 사진과 수감 이후의 사진을 번갈아 보며 몇 년 사이에 몰라보게 초췌해진 모습에서 수형 생활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하에 있는 고문실에서는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물고문, 손톱 찌르기, 못상자 고문, 벽관 고문 등 상상하기도 싫은 각종 고문을 일제는 서슴없이 가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조선시대 명문가였던 우당 이회영 일가. 지금 돈으로 800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이회영 아드님의 고문 받았던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보안사를 나와 감옥이 있는 중앙사로 향했다. 작은 감옥에 각 조의 학생들이 다 들어가 보았다. 20명이 되지 않는 학생들이 빙 둘러섰는데도 작게만 느껴지는 감옥. 이 감옥에 40명이 수감되었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뜬다. 누워서 잘 수도 없고 곁에 있는 동지들의 체온이 부담스러워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짧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간단한 무기와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쉴새 없이 일해야 했던 수감 생활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통곡의 미루나무를 지나니 사적 324호로 지정된 사형장이 나온다. 죽음이 두려워서


그리고 여옥사에 들어섰다. 어린 여고생, 여인의 사진에 더욱 가슴이 아프다. 특히나 비좁고 어두운 지하에 있는 감옥. 나라를 되찾는 데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음을 보여준다.

현장학습을 끝내고 학생들이 보고 느낀 점을 발표했다. '오! 저렇게 느꼈다니…' 듣고 있는 어른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놀라웠다.

"다시는 이런 수모를 겪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겠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기 위해 머리를 쓴 것을 보고 놀랐다. 그 좋은 머리로 왜 그런 나쁜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좋은 능력을 좋은 일에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고문실, 사형장 등을 보니 정말 참혹하고 가슴 아팠다. 그렇게 고통 받으면서도 나라를 찾으려 애써 주신 조상들 덕분에 오늘 이렇게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 "나 혼자만 잘 살려고 했던 것이 부끄럽다." 어리게만 보였던 자녀들의 느낀 점을 듣고 부모들도 놀라고 깨닫는 바가 많았던 현장학습이었다.

이렇게 소중한 아이들에게 다시는 아픈 역사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더욱 정신을 차리고 바른 역사와 좋은 나라를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하며 현장학습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