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일본 수군과 벌인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고, 사천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명량대첩에서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130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고 모두 패퇴시켜 대승을 이룬다.

이순신을 헐뜯은 원균은 180여 척의 배와 8,000명 이상의 정예 수군을 이끌고도 칠천량에서 완패했다. 그에 반해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130척의 적선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효충도의 정신이 가득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근접전을 피해 포격전 위주의 근대적 개념의 해전을 세계 처음으로 창시하고 진법을 활용하여 이미 이겨놓고 싸운다는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이룩하였다. 선조와 간신배의 시기와 모략, 백의종군, 지극히 인간적인 이순신 장군의 국혼은 위대한 민족애와 ‘필사즉생’의 기백으로 전승함으로써 백척간두에 놓였던 조국을 구하였다.

▲ 이순신 장군 (원암 장영주 作)

이순신은 선도의 핵심 덕목인 효, 충, 도를 몸소 실천하였다.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아닌 보통으로서 도달하기 어려운 위대하고 거룩한 정신의 성웅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1905년 5월 27일 대마도 해전에서 일본의 도고 제독은 로제스트 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세계 최강의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하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도고 제독은 “나를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이순신이 제독이면 난 하사관에 불과하다”라고 말하였다.

또 일본 해군 중장 사토 데스타로오도 다음처럼 극찬한다.

“(-전략-) 해군 장군으로서 먼저 동양에 있어서는 한국의 장수 이순신, 서양에 있어서는 영국의 장수 넬슨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순신은 실로 세계적인 해장이다. 불행히도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용명도 지명도 서양에 전하고 있지 않지만 불완전하긴 해도 임진왜란에 관한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장군이다.

서양에 있어서 이에 필적할 만한 자를 찾는다면 네덜란드의 장수 미힐 드 로이테르(Michiel de Ruyter, 1607~1678) 이상이라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인격에서 도저히 견줄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창조한 사람이며, 300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써 싸운 전쟁 지휘관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3전 3패를 한 일본의 명장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일기에 보면 비록 적장이지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을 잘 알 수가 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의 신념, 열정, 철학 즉, 효충도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필생즉사 사필즉생(必生卽死 死必卽生)”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불여조사야(不如早死也)”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만 먼저 가버리셨다. 아침에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울며 하직을 고하였다. 천지간에 나 같은 이가 어디 또 있을까?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쟁에 의병을 이끌고 참전했던 의병장 은봉 안방준(1573~1654)은 현장에서 들은 이순신 장군의 유언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는다.

“나는 도(道)를 다하기 위하여 총을 맞은 것이다.” 「은봉야사별곡」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감연히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해내신 이순신 장군께서는 54세의 나이로 차가운 노량바다에서 숨을 거두신다. 이로써 7년에 걸쳐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은 끝이 난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오늘도 눈 쌓이고 바람 부는 추운 한민족 역사문화공원에서 큰 칼을 옆에 차고 우리를 지키고 계시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