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장려한 역사는 대막리지 연개소문(?~666년)이 죽고 불과 2년 만에 패망하게 된다. 동북아시아 주인이었던 강대국 고구려에 대한 아쉬움으로 막상 연개소문은 평가절하되어 있기도 하다. ‘이 패주하는 당 태종을 쫓아 산둥성까지 정벌했다’는 기록도 있듯이 연개소문은 그저 그런 장군이 아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를 통해 "연개소문이야말로 고구려의 걸출한 민족 영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영걸(英傑)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당 태종 이세민도 연개소문만큼은 두려워했다. ‘당을 정벌하고 한민족의 얼을 드높일 것을 주장한 연개소문은 큰 꿈의 나래를 펼치고자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 정치를 바로 잡았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걸이었다“고 했다.

중국인이 세계에 자랑하는 ‘경극’에는 칼을 다섯 개나 차고 끝까지 주인공을 겁박하는 무서운 역할이 등장한다. 그 정체가 바로 고구려의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은 중국인에게는 이처럼 무서운 존재이다.

▲ 중국의 경극에 등장하는 ‘5개의 칼을 찬 인물’은 바로 연개소문 [제공=국학원]

고구려의 일반 남자들은 누구나 다섯 자루의 칼과 숫돌까지 차고 다녔다.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위압감과 공포감을 주었다는 설은 그에게 크게 혼난 당 태종 이세민과 사대주의자들의 왜곡된 시각일 뿐이다. 연개소문은 단지 보통 고구려 남자들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아홉 살에 ‘조의선인(皁衣仙人)’에 뽑힌다.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다.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하사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고, 상대방의 진심 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다.

또한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였고 딴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이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호걸이었다.

연개소문이 드디어 뜻을 이루자, 모든 법을 공정 무사한 대도로 집행하였다. 이로써 자신을 성취하여 자신의 주인이 되고 ‘성기자유(成己自由)’하니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 되었다. 또한 ‘개물평등(開物平等)’하고 세 마을에 전(佺)을 두고 조의선인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그는 당시 고구려를 좀 먹어오던 중국의 도교 등, 외래사상의 유입을 경계하고 한민족 고유의 선도 사상을 중심철학으로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호를 따 지은 <김해병서(金海兵書)>를 남겼다. 우리의 기후와 지형에 맞는 탁월한 <김해병서>가 사라지고 대신 중국의 ‘손무’가 지은 <손자병법>이 들어 온 이후 우리는 중국과 싸워 이기지를 못했다고 한다.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는 흰 눈이 내려앉아 그야말로 선경(仙境)이 되었다. 그 흰 눈을 하염없이 맞으며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우뚝 서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 당신의 후손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금수강산과 세계를 이끌어 갈 홍익정신을 잘 지켜 가고 있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계신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