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에서 진행하는 이번 문화재청,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후원 답사지는  바로 서울의 중심인 한양도성 남산구간과 남산한옥마을이다. 6월 21일 오전, 전날 밤에 내린 비로 우산 쓰고 답사할 모습을 그렸던 우리 60여명은 화창한 날씨에 감사했다. 동대입구역에서 남산 순환버스를 타고 남산을 올라갔다.
한양도성이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분명 한양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곳이었을 남산. 그곳에 지금은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이 위치한다.

▲ 서울 남산은 목멱산, 인경산, 마뫼, 종남산으로도 불렀다. 이곳에 있던 목멱대왕을 모시는 사당은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사당이었으나, 지금은 인왕산으로 옮겨진 상태이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우리는 두 차례에 걸친 지난 성곽 길 답사를 통하여 한양도성  내사산 가운데 하나인 인왕산과 낙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남산에서 내려다 볼 차례이다. 백악산을 마주하니 도심의 녹색지대에 종묘 정전의 지붕이 보이고 시선을 동쪽으로 옮기니 낙산이 보인다. 

▲ 산세가 낮은 낙산은 절반 이상이 집으로 덮여 있다. 에전에는 낙타를 닮았다 하여 낙타산, 궁중에 우유를 보급하는 우유소가 있어 우유의 옛 이름인 '타락'을 붙여 타락산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이제 조선시대의 통신수단인 봉수대를 알아보자. 조선시대 이전에도 봉수가 사용되었다 하나 조선 초기(세종1)에 5구분법으로 굳어졌다 한다. 초기에는 해안과 육지를 구분하였으나 '경국대전' 편찬 이후에는 일원화하였다. 평상시는 1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2개, 국경 가까이 오면 3개, 국경을 넘으면 4개,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봉수를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피웠다 한다. 전국 5개 방향에서 전해져 이곳에 집결되는 봉수를경복궁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한다. 지금은 5개의 마지막 봉수대 중 한 개만 고증을 거쳐 복원해 놓았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어떻게 다음 봉수대까지 전달할까? 불화살이나 뿔나발.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직접 말을 타고 달렸다 한다.
▲ 행사가 있어 봉수대 위로는 올라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우리는 남산 봉수대에서 남산 한옥마을 후문까지 산책길을 따라 걸어 내려왔다. 즐거운 점심 시간. 잠시 휴식을 한 후 다시 두 조로 나누어 한옥마을을 돌아보았다. 한옥마을은 1998년 남산 제 모습 찾기 운동의 하나로 조성됐다. 조선후기 양반집 4채를 해체,  이전하고  낡은 1채를 복원하여 한옥의 멋스러움을 알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장소이다.

조선시대 남촌과 북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경복궁과 가까이 고관대작들이 모여 사는 곳을 북촌이라 한다면 벼슬자리를 꿈꾸며 가난하지만 꼿꼿한 지조를 지키는 선비들이 모여 사는 곳을 남촌이라 하였다. 남산골샌님과 남산골 딸깍발이는 바로 그 선비들을 지칭한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소과와 대과로 나누고 소과는 다시 진사과(한문학)와 생원과(유교경전)로 나누어 시행됐다.  생원과에 합격한 사람을  '생원님' 즉 '샌님' 이라 불렀다.

▲ 우리 선조들은 한옥의 추녀를 살짝 위로 향하게 하여 지붕이 무거워 보이지 않도록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우리 한옥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건축 폐기물이 나오지 않는 친 환경소재이다.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 나무, 종이를 주 재료로 한다. 둘째, 과학적이다. 가열 시 황토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건강에 좋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기후 특성상 온돌은 추위를 막고, 시원한 대청마루와 직사광선을 피하게 하는 처마는 여름을 날 수 있게 한다. 집은 그 곳에 사는 사람의 철학을 나타낸다. 한옥은 남녀유별 사상을 반영하여 여성이 주로 의식주를 위해 활동하는 안채와 남성들의 생활 공간인 사랑채를 분리하고 있다. 또한 가족 내에서도 서열에 따라 머무는 공간이 정해진다.

▲ 장독대는 양지 바른 곳에 단을 높여 만들었다. 통풍이 잘 되어 장독 안의 발효음식들이 잘 보존되도록 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제일 처음 들어간 곳은 옥인동 윤씨 가옥. 이 집에서는 한옥 구조뿐 아니라 소유주였던 친일파 윤덕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그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에게 경술국치,  즉 한일병합을 강요하는 일본 고위관료과 매국노 을사5적과 함께 있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옥새를 치마 속 밑에 숨기고 있던 순정효황후를 번쩍 들어올려 옥새를 이완용에게 건네준 사람이 바로 그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다.
다음은 윤덕영의 친동생인 윤택영의 재실. 딸이 왕비가 된 후 제사 지내기 위한 집인 재실을 나라에서 지어 주었다. 이 집은 사당과 안채, 사랑채가 으뜸원(元)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당을 들여다보면 4대의 조상들의 교의가 있다. 4대봉사라하여 5대가 사망하면 제일 위 어른의 위패는 묘 앞에 묻어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 대청 마루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양반들은 신발을 신을 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잡을끈이 있다. 또한 분합문이 있어 필요에 따라 위로 들어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다음은 친일파 민영휘 가옥이다. 부유한 조선 사대부의 전통 가옥 양식을 잘 보여준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로지르는 담에는 두 개의 출입문이 있다. 가장인 아버지와 아들이 다른 문으로 드나든다. 안채에 딸린 별당은 결혼 전 딸이 기거했을 것이다. 별당아씨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한다. 갓 시집 온 며느리가 어느덧 세월이 지나 이 집의 곳간 열쇠를 받게 되면 안방은 며느리가 차지하고, 시어머니는 건넌방으로 옮긴다. 사랑채의 누마루가 이 집의 부를 보여준다.

▲ 동그란 돌 위에는 한양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각국에서 보낸 축하 메세지가 새겨져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그 밖에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오위장 김춘영 가옥과 대장 목수인 도편수 이승업가옥을 둘러 보았다. 
 
 조금만 올라가면 타임켑슐광장이 있다. 이곳은 서울시가 한양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1994년에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600점의 물건들을 축소모형, 또는 사진으로 보신각종모양의 캡슐안에 담아 지하 15m에 묻어 놓은 것이다.

한양정도1000년이 되는 2394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그때쯤이면 엄청난 문화재가 되지 않을까?

▲ 남산, 남산한옥마을을 답사하고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문화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이다. 조상들의 지혜가 묻어나는 옛 가옥들을 보며 그들을 더 이해 할 수 있었다. 아울러 나라를 팔아먹는 데 자신의 재주를 사용한 이들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해 볼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