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 왕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한양을 도읍으로 삼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종묘를 지은 것이었다. 그 다음해 10월에 완성되었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은 윗부분이 창살 형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선조들의 영혼이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들이 다니는 길인 신도는 밟지 않았다고 한다.
종묘에 고려의 왕이었던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공주의 영전을 모셔 놓았다. 왜일까? 태조 이성계는 자신을 발탁한 공민왕이었기에 예의를 갖추고자 했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되 고려와의 연계성을 인정함으로써 조선의 가치를 드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이어 향대청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제례의식에 필요한 각종 비품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실제로 신주가 모셔져 있는 정전 안 태실 내부를 재현하여 신발을 벗고 들어가 볼 수 있다. 향대청을 나와 이번엔 어재실, 세자재실, 어목욕청을 보았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묘의 제사 즉 종묘대제는 왕이 직접 참가하게 된다. 왕은 세자와 이곳에 제사 전날 와서 목욕재개를 하며 다음날의 행사를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했다.
또한 제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정성껏 준비해야 하는 음식이 아닐까? 이번엔 음식준비를 했던 전사청을 둘러보았다. 그 옆에는 우물과 제사 때 사용할 음식을 검사했던 곳이 남아있다. 제사음식은 의례히 익힌 음식을 떠올리는데, 실제는 커다란 생고기 덩어리, 곡식낟알들도 제사상에 올려 선조들의 영혼과 잘 교감하고자 했다.
목욕재개를 마치고 선조들과의 만남을 준비한 왕과 일행은 이제 종묘의 중심건물인 정전을 향한다. 정전을 둘러싼 담에는 세 개의 출입구가 있다. 중앙출입구는 선조들의 영혼이, 동쪽 문은 왕과 일행이, 서쪽 문은 제례악을 연주할 악사들이 이용했다. 정전은 19칸의 문과 20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 화려하지 않지만 절제미가 느껴지는 건물이다. 그 안에는 19명의 왕과 49명의 왕비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임진왜란 때 불탔고 광해군이 다시 지었다. 광해군은 폐위되었기에 이곳에 신주가 없다.
마당에 깔린 박석은 다른 궁들보다 보존상태가 좋아 원래의 거친 느낌을 잘 알 수 있다. 정전과 박석들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 공신당이다. 왕들을 도와 나랏일에 공을 세운 83명의 신주가 있다. 그들에게도 끝까지 예의를 다함으로써 조선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한 선조들의 간절함이 배어난다. 조선의 나머지 왕들의 신주는 어디 있을까? 서쪽문으로 가면 제 2정전이라 할 수 있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그 곳에는 태조의 조상들과, 단종을 비롯한 34개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 종묘대제를 볼 수 있다. 500년 이상 이어온 이 의식을 장식하는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상에 대한 엄숙한 예의와 함께 음악과 춤을 통해 그들과 교감하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담긴 소중한 유산이다. 선조들의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효와 충을 마음에 새겼다.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이라 불리는 정전을 뒤로 한 채 영령전에서 북쪽에 있는 창경궁을 가기 위해 다시 정문으로 나왔다. 원래는 종묘와 창경궁이 연결되어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그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지금은 그 길을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다시 한번 들러 연결된 그 길을 걸어보리라고 다짐하며 창경궁 답사까지 마치고 현장학습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