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후원하는 문화유산 방문교육 현장학습 일곱 번째 방문지는 경희궁과 덕수궁이다. 5월 31일 때이른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아픈 역사를 배우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는 뜨거운 시간이 되었다.

▲ 학생들이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수선전도(首善全圖)에 올라서서 한양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로 원래 모습을 거의 잃어버렸다. 그래서 경희궁이라고 하지 않고 경희궁지, 경희궁터라고 이야기 한다. 지금은 일부를 복원하여 이곳에 경희궁이 있었음을 알리는 정도이다. 경희궁에서  훼손된 역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다.  학생들은 옛 흥화문 터에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조선의 서궐이었던 경희궁 답사를 시작했다. 흥화문은 아시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 정문으로 쓰기 위해 떼어갔다.

▲ 학생들은 경희궁의 임금님 바위 서암에서 조선의 왕들을 생각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이후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는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1994년 경희궁 복원사업으로 다시 가져왔으나 원래의 정문자리에는 이미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어 제 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엉뚱한 자리인 지금의 위치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도 일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고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에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학교 건물로 사용하고 훼손한데다가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면서 그 모습을 더욱 찾기 어려워졌다.
▲ 학생들은 나라를 잃고 훼손된 경희궁을 보면서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광해군이 만든 경희궁. 정작 광해군 본인은 이 경희궁에서 생활해보지 못하고 인조 반정으로 물러나게 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 임금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 임금이 이 경희궁에서 치세의 절반을 보냈다. 그래서 영조의 어진이 이곳 경희궁 태령전에 모셔져 있다.

▲ 더위 속에서도 학생들은 궁의 아름다운 모습을 진지하게 감상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학생들은 임금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서암에 올라서서 광해군과 인조, 오랜 치세를 했던 영조, 그리고 일본에 의해 없어진 안타까운 경희궁을 바라보며 다시는 나라를 잃지 않도록 힘을 키우겠다는 다짐을 했다.
▲ 을사늑약이 체결된 치욕의 현장 중명전.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경희궁을 나와 덕수궁을 가는 정동길. 이 정동길도 구한말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서구열강의 공사관이 당시의 대표적 무역항이었던 마포와 궁궐에서 가까운 이곳에 들어서면서 서구식 교육기관과 종교건물이 집중되는 근대문물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정동교회와 옛 대법원 건물인 서울시립미술관, 이화여고, 구 러시아공사관 등을 보면서 19세기 후반 격변기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을 답사했다.

▲ 외면할 수 없는 아픈 역사. 이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1905년 11월 17일 밤부터 18일 새벽까지 이어지면서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이곳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외교권을 빼앗았다. 끝까지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 등이 있었으나 이완용 등 을사5적이 늑약에 도장을 찍게 된다. 이후 주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등의 활동이 있었으나 결국 좌절하게 된다.
▲ 학생들은 덕수궁 숭정전에서 임금이 앉는 자리인 어좌를 관람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를 빼앗긴 치욕의 현장을 보면서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말이 없었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 아픈 역사. 그 역사를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뼈아픈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던 궁이었다. 이후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의 궁이 되어 본격적인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덕수궁 석어당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거처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정관헌, 석조전 등의 여러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어 다른 조선의 5대 궁궐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구한말 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위태로웠던 나라의 운명.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홀로 쓸쓸히 지냈던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결국엔 그곳에서 독살당한 고종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고종이 예순에 본 고명딸인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는 준명당을 보니 괴로운 정사 속에서 유일한 웃음을 지었을 고종과 이후 덕혜옹주의 기구한 운명이 떠올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 나라가 가장 위태로웠을 때의 궁이었다.
▲ 학생들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외부의 도전에 올바르게 대처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학생들은 수난의 역사를 배우며 나라의 소중함과 함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더욱 열심히 배우겠다는 다짐을 하는 학생들을 보니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련에 더욱 단련되고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우리 민족의 강인함을 배우며 희망을 향해 다시 전진하는 우리가 될 것을 다짐하는 뜻깊은 현장학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