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a bright place 16,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240x240cm. 이미지 갤러리밈 제공
Standing in a bright place 16,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240x240cm. 이미지 갤러리밈 제공

한국화의 전통 매체인 먹의 물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탐구하고 실험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현대수묵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중견작가 이기영 개인전 《밝은 곳에 서 있다》가  9월 10일 개막한다. 이 전시는 갤러리밈 개관 10주년 기념전으로 기획, 갤러리밈 4층~6층까지 3개 전시장에 신작 22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소석회를 바른 한지 위에 먹으로 기억의 단편들을 쓰고, 그리고, 지우고, 또다시 그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겨나는 화면의 시각적 혼란을 직관적으로 수용하여 그 위에 날카로운 칼로 선을 파내고 안료를 채워 색선을 새겨내는 작업 방식을 본격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작품세계 선보인다.

즉흥적인 행위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묵직한 수묵의 풍경 위에 정밀한 선들로 새겨진 기하학적 도형 이미지들은 자유와 형식화 사이의 긴장감을 표현한다. 먹의 흔적과 색선이 만나는 조합은 세상의 그 어느 대상과도 닮지 않고, 그 어떤 환영을 일으키려는 목적도 갖고 있지 않은, 낯설면서도 독특한 작가의 내면 풍경을 반영한다.

Standing in a bright place 10,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120x165cm. 이미지 갤러리밈
Standing in a bright place 10,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120x165cm. 이미지 갤러리밈

일정 거리에서 떨어져 바라볼 땐 묵직한 수묵 풍경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조금씩 작품에 다가설 때마다 각기 다른 색감으로 드러나는 선들로 인해 작가만의 독창적인 내면 풍경을 연출한다.

이기영 작가에게 자유는 지워져 사라질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새로운 연작에선 극도의 몰입과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진행한 선 작업을 중도에 돌연 중단하고 그 상태 그대로 작업의 결과물로 제시한다. 물감으로 덮힌 화면 아래 숨겨져 있는 무수한 먹의 흔적과 정교한 색선의 존재들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 부재의 존재로 남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세계의 중요한 지점인 ‘지워져 사라질 것을 그려내는 작업’을 또 다른 버전으로 선보인다. 자신의 작품이 세상의 의미로 연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작가는, “아무것도 아닌 내 작업이 누군가에게 한순간 뭉클한 무엇이 되는, 혹은 빛 속에 서 있는 느낌을 주는 그 어떤 것이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드러낸다.

Standing in a bright place 18,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122x122cm. 이미지 갤러리밈
Standing in a bright place 18,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122x122cm. 이미지 갤러리밈

정소라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은 '전시 서문'에서 이기영 작가의 작업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는 감정을 일으키는 순간에 이끌린다. 과거의 기억에서 출발하여 먹으로 쓰거나 그려내고 그것을 다시 손으로 지우면서 어떤 감정이 촉발될 때 몸의 동작을 멈춘다. 이 바탕 작업은 이후 정교한 본 작업 단계로 넘어간다. 작가의 계산된 구상을 바탕으로 여러 개의 색선을 만들게 되는데, 직선을 파내어 안료를 채워넣는 상감기법을 적용한다. 무수한 사포질을 통해 표면은 완전히 연속적인 하나의 면처럼 보이게 된다. 이 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세밀함을 요구하기에 신체가 자아내는 긴장감이 작품에 내재하게 된다. 그 선들은 바라보는 위치마다 다르게 보일 수 있도록 정확하게 계획된 위치와 색을 갖고 있다. 관람자가 작품에서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는냐에 따라 작품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데, 색선들은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작품이 ‘기운생동’의 구조를 갖도록 고려된 중요한 요소들이다.

열린 변증법

이번 전시에는 이와 같은 방식의 작업들이 20여 점이 소개되는데, 이 작품들에는 질서와 자유, 구조와 해체 같은 대립항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절대적 상태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립항들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긴장감을 유지한 채 공존한다. 이 긴장은 화면을 정지된 이차원적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과정으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과정은 변증법적 운동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하나의 구조(正)가 화면을 형성하면, 곧 그것은 해체(反)로 향한다. 그러나 두 힘의 흔적은 새로운 합(合)으로 모여진다. 그러나 이 합은 고정된 조화가 아니라, 다시 정과 반의 단계를 거쳐 다른 합으로 나아가는 열린 변증법이다. 이기영의 작품은 헤겔의 정반합을 연상시키면서도,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화면은 선형적 발전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차이를 낳는 유동적 종합과 같다. 그리거나 써진 무엇인가는 지워지고, 파내어진 부분은 다시 채워진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자유로운 신체 행위의 흔적 위에는 계산되고 긴장감을 머금은 직선이 기하학적 질서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는 평평함, 즉 하나의 평면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애써 만들어진 평면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러 단계의 수행적 수고스러움에는 어떤 의미가 얹어질 수 있을까?

Cat_s cradle 05,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60x120cm. 이미지 갤러리밈
Cat_s cradle 05,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60x120cm. 이미지 갤러리밈

 

절대적 상태로서의 평면

평면은 오히려 입체보다 고정된 현상을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 평면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절대적 상태이다. 없음, 즉 무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변증법적 과정은 실은 생성의 살아있는 단계에 도달하게 한다. 삶이 결국은 생성에서 소멸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삶의 긴 여정 속에 우리는 무한히 많은 새김과 흔적을 남겨 놓는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만남과 이별 등 인간이 갖게 되는 여러 사건과 감정 그리고 관계와 기억은 개인의 신체와 인간 존재가 거주하는 세계에 각인된다. 이기영의 작업은 정과 반을 거쳐 합에 이르는 과정 속에 만들어지며 그렇게 만들어진 작업의 결과물인 평면 속에 여러 불연속적 면이 있듯이, 최종적인 부재가 곧 존재이며, 소멸이 곧 생성인 것이 곧 삶의 원리임을 깨닫게 해준다.”

D620511,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55x45cm. 이미지 갤러리밈
D620511, 2025, Mixed media on Korean paper, ink cake, pigment, 55x45cm. 이미지 갤러리밈

갤러리밈 개관 10주년 기념전 이기영 개인전 《밝은 곳에 서 있다》는 10월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