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고은, rumbling sound of the creek, 2024, 캔버스에 아크릴과 모델링 페이스트, 50x50cm. 이미지 Hall 1
설고은, rumbling sound of the creek, 2024, 캔버스에 아크릴과 모델링 페이스트, 50x50cm. 이미지 Hall 1

서울 영등포구 Hall 1에서 7월 5일 개막한 설고은 작가 개인전 《Cracks, Ripples, and What Not》은 총 53점의 대형 드로잉과 17점의 신작 회화로 구성되며, 전통적인 회화 감상 방식에서 벗어난 배치로 관람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설고은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드로잉들은 얇은 트레이싱지에 옅은 하늘색 선으로 구성된 작품들로 벽면에 수직으로 설치된다. 탈색된 듯한 옅은 회색조의 회화 작품들은 바닥의 현무암 블록 위에 설치되어 마치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배치는 Hall 1 바닥에 실재하는 크랙과 회화의 표면이 서로 호응하여 관객에게 회화 또한 하나의 흔적이나 잔해처럼 읽히는 경험을 유도한다. 전시 공간 전체가 시간이 축적된 레이어처럼 감각되도록 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핵심이다.

설고은 작가는 2024년 9월부터 2025년 6월까지 베니스, 서울, 광주 등 여러 도시에서 벽면의 균열, 도로의 틈, 부식된 페인트, 자연에 의한 침식 등 물리적으로 남겨진 흔적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설고은은 상실을 떠올리게 한 건물, 바닥, 돌, 나무 등 거리 곳곳의 흔적들을 사진으로 찍고 디지털 툴로 편집해 단순화한 뒤, 이를 각각의 ‘층(layer)’으로 만들었다. 출처와 모양이 다른 층들은 트레이싱지를 경유해 겹치고 겹쳐 하나의 화면이 되었으며, 화면들은 다시 바닥과 벽을 점유하며 모종의 사건처럼 모였다. 서로가 서로를 축적하면서 말이다”라고 언급한 김진주 큐레이터의 ‘전시 서문’에서 작업 과정을 상상해볼 수 있다.

설고운 개인전 "Cracks, Ripples, and What Not" 전시 모습(일부). 이미지 설고운
설고운 개인전 "Cracks, Ripples, and What Not" 전시 모습(일부). 이미지 설고운

설고은 작가가 지난 개인전에서 선보인 112점의 연작은 강박에 가까운 회상으로 기억을 붙잡으려는 시도였다면, 《Cracks, Ripples, and What Not》展에서는 지난 과정에서 느낀 무력함을 인정하고 상실이 남긴 흔적을 마주하고 공존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설고은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뜻하지 않게 떠나보낸 장소나 대상에 대한 기억이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와 삶을 뒤흔드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마음을 줬던 관계들과 이별하는 것이 유난히 어렵게 느껴진다. 마치 현재의 내가 물리적으로 위치한 시간과는 별개로 과거의 시간에 사로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뜻하지 않게 떠나보낸 장소나 대상에 대한 기억은 내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언젠가 친구에게 몸과 마음이 각기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라는 어려움을 털어놓자 친구는 그래도 붙잡고 있는 기억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기억들이라서 다행이라고 위로해주었다. 그 말처럼 내가 사로잡혀 있는 기억들은 상대와 깊은 연결감을 느낀 순간처럼 변화무쌍한 일상에 드물게 찾아오는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시간이 소중할수록, 그리고 그 시간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기억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커졌다. 결국 이런 좋은 기억들조차 나를 얽매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현재에 있지 만 정신은 과거를 배회하고 있는 느낌은 지난 봄 개인전 《No Point of Contact》(2024)을 준비하며 더욱 강렬해졌다. 이 전시에서 나는 동일한 20개의 레이어를 112개의 캔버스에 변주한 <찾을 수 없는 너의 흔적 을 찾아 조슈아 트리 공원을 검색하지만 유튜브의 짧은 영상들은 끝없이 돌아 가는 회전문처럼 연결되지만 연결되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나를 인도한다> 회화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이 전시는 강박적인 회상에 가까운 과정 을 통해 특정한 기억에 닿으려는 시도였지만, “No Point of Contact” 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결국 과거의 시간은 닿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전시를 끝내고 난 뒤에 나는 비로소 과거의 기억을 단순히 반복적으로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기억들과 현재의 삶을 조화롭게 연결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한 개인의 역사에서 빛 나는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지, 우리는 지나쳐온 시간을 어떻게 회고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지나온 과거의 시간들이 한 장, 두 장의 이미지로 압축되어 현재의 시간을 만나는 지점을 전시라는 형태로 제시하고자 한다. 붓을 들고 캔버스를 만날 때, 과거의 기록들을 다시 살펴보고 재해석하고 내가 이해가능한 이미지로 조립할 때, 그 과정에서 나는 지나간 순간을 수용하고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설고운 '작가 노트')

설고운 개인전 "Cracks, Ripples, and What Not" 전 포스터.  이미지 설고운
설고운 개인전 "Cracks, Ripples, and What Not" 전 포스터. 이미지 설고운

1994년 태어난 설고은 작가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시각예술을 전공하였으며 2021년 서울대학교 서양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2024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개인전 《NO POINT OF CONTACT》와 2022년 스펙트럼 갤러리에서 개인전 《AFTER, IMAGE》을 열었다. 《계란부터 사과까지》(2023, 신한갤러리), 《원본없는 판타지》(2023, 온수공간), 《물질구름》(2022, 아트스페이스3) 등 주요 단체전에 참가했다. 현재 광주시립미술관 국제레지던시에 작가로 입주해있다. 

이번 전시는 2025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로 진행한다. 설고은 작가 개인전 《Cracks, Ripples, and What Not》은 7월 24일까지 Hall 1(서울 영등포구 양평로22마길 8)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