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만머핀이 6월 12일 개막한 《네모: Nemo》전은 게스트 큐레이터 엄태근의 기획 아래, 한국과 미국에서 활동해 온 저명한 추상화가 4인의 작업을 소개한다. 참여작가는 맥아서 비니언, 정상화, 스탠리 휘트니, 윤형근.

참여작가들은 1970년대부터 격변의 시대를 살아오며 각자의 방식으로 추상회화를 깊이 있게 탐구해 왔다. 네 명의 작가는 문화권과 시대적 배경이 서로 다르지만, 그들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형식에 대한 치열한 고민, 정체성에 대한 질문, 사회적 기억에 대한 성찰이 작업 전반에 스며 있다. 이번 전시는 이들의 추상이 단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흔적이자 시대의 증언으로 기능하며, 추상이 감정과 기억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MCARTHUR BINION, DNA:Study/(Visual:Ear), 2022, ink, paint stick and paper on board, 72 x 48 inches, 182.9 x 121.9 cm,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이미지 리만머핀
MCARTHUR BINION, DNA:Study/(Visual:Ear), 2022, ink, paint stick and paper on board, 72 x 48 inches, 182.9 x 121.9 cm,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이미지 리만머핀

1946년 미국 미시시피주 메이컨에서 출생한 맥아서 비니언은 콜라주와 드로잉, 페인팅을 결합하여 사적인 문서와 사진의 표면에 격자무늬의 그리드(grid)를 중첩하는 자전적 추상 작업을 한다. 그의 작품에는 작가 자신의 출생증명서, 주소록, 전화번호부, 유년 시절 그림과 흑인 린치 사진 등이 등장하는데, 이는 오일 스틱으로 그린 그리드로 인해 은폐되고 추상화된다. 거시적 관점에서 비니언의 작업은 그리드나 연속적인 형태, 반복과 같은 요소를 작품의 전략적 장치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 및 개념주의의 특징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제스퍼 존스, 로버트 라이먼, 브라이스 마든과 같은 동시대 미술가들이 물질성, 추상성, 때로는 그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분위기에 더 집중했던 반면, 비니언의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회화를 만드는 고된 과정 자체에 깊이 헌신되어 있다.

정상화(1932년 경북 영덕 출생, 현재 여주에서 거주 및 작업)는 한국 단색화 운동의 선구적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인 기법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고 건조한 후 일부를 벗겨내고 다시 칠하는 ‘제거와 채움’의 반복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노동집약적인 방식은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는 물리적 흔적을 남긴다. 이에 따라 화면은 일견 균일한 패턴처럼 보이지만, 섬세한 질감과 균열의 차이로 구성되어 있다. 정상화의 ‘사각형’은 반복과 축적을 통해 조용한 울림을 지닌 회화적 공간으로 탄생한다.

1969년, 세계 미술의 흐름에 깊이 참여하고자 일본 고베로 이주한 작가는 점차 표현주의적 앵포르멜 회화에서 벗어나 평면적 언어의 미니멀리즘으로 전환하게 된다. ‘벗기고 채우는’ 기존의 방식은 유지하되, 캔버스를 분리하거나 접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다. 1973년부터는 단색의 격자 회화가 등장하며 그의 작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격자 구조는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양식이 되었다.

스탠리 휘트니(194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출생, 현재 뉴욕 브리지햄프턴과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거주 및 활동)는 생동감 있는 그리드 기반의 추상 회화로 잘 알려진 미국 작가이다. 그의 작업은 즉흥성과 직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종종 자신의 창작 과정을 재즈 음악에 비유하며, 각각의 색 선택이 다음 색을 결정짓는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시각적 리듬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휘트니는 보통 왼쪽 상단 모서리의 단일 색 띠에서 시작하여 캔버스를 가로질러 차례차례 구성을 쌓아가며 구조와 자발성의 상호작용을 수용하며 화면 전체에 걸쳐 체계적으로 구성을 구축해 나간다. 회화 외에도 모노타입, 드로잉,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탐구한다.

CHUNG SANG-HWA정상화, Untitled 85-5-6, 1985, Acrylic on canvas, 47 1/4 x 47 1/4 inches (artwork), 120 x 120 cm, 49 3/8 x 49 3/8 x 2 1/8 inches (framed), 125.5 x 125.5 x 5.3 cm. Courtesy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and Gallery Hyundai. Photo by OnArt Studio.
CHUNG SANG-HWA정상화, Untitled 85-5-6, 1985, Acrylic on canvas, 47 1/4 x 47 1/4 inches (artwork), 120 x 120 cm, 49 3/8 x 49 3/8 x 2 1/8 inches (framed), 125.5 x 125.5 x 5.3 cm. Courtesy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and Gallery Hyundai. Photo by OnArt Studio.

윤형근(1928-2007, 충북 청주 출생)은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단색화 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윤형근은 일제 강점기, 전쟁, 독재 등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세계관과 예술적 실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

윤형근은 바닥에 펼친 면 또는 리넨 캔버스 위에 청색과 다색 유화를 수직의 띠 형태로 차분히 덧칠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는데, 그는 이 두 색을 각각 “하늘의 색”과 “땅의 색”이라 불렀다. 이 두 색을 반복적으로 덧입혀 가장자리가 은은히 빛날 때까지 겹칠 때, 그의 ‘하늘과 땅의 문’이라는 개념이 구현되었다. 장식이나 감정적인 표현을 철저히 배제한 그는 자연의 겸허함과 절제, 단순함, 영적인 인내를 반영한 엄격한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다. 그의 작품은 고목, 대지, 시간의 흔적을 떠올리게 하며, 조용한 품격과 깊은 명상적 힘을 지닌다.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더욱 간결해졌지만, 40년 이상 동일한 엄격한 작업 방식에 충실했다. 그의 회화는 미학적 순수성뿐만 아니라 철학적 깊이와 감정적 울림으로 관객과 교감하며, 그의 붓질은 치열한 정신적·육체적 수련의 결과로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넘어선 에너지와 존재감을 드러낸다.

STANLEY WHITNEY, Untitled, 2020-21, Oil on linen, 12 x 12 x 3/4 inches (artwork), 30.5 x 30.5 x 1.9 cm, 18 1/4 x 18 1/4 x 1 3/4 inches (framed), 46.3 x 46.2 x 4.5 cm, Courtesy of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Galerie Nordenhake; and agosian. Photo by OnArt Studio.
STANLEY WHITNEY, Untitled, 2020-21, Oil on linen, 12 x 12 x 3/4 inches (artwork), 30.5 x 30.5 x 1.9 cm, 18 1/4 x 18 1/4 x 1 3/4 inches (framed), 46.3 x 46.2 x 4.5 cm, Courtesy of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Galerie Nordenhake; and agosian. Photo by OnArt Studio.

 

이번 전시 제목 ‘네모(Nemo)’는 사각형을 뜻하는 순우리말 ‘네모’에서 출발했으며, 동시에 라틴어로 ‘아무것도 아닌(Nemo)’, ‘누구도 아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네모’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넘어 정체성과 서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전시에 소개되는 회화 속 ‘네모’ 형상들은 반복되며, 격자무늬(그리드)를 이루거나 하나의 독립적인 형태로 남아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점을 선으로 잇는 단순한 도형인 ‘네모’는 평면적인 상징을 넘어서, 작가들에게는 추상이라는 보편성을 시각화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도구로 기능한다. 이번 전시 《네모: Nemo》는 작가의 사적인 서사를 넘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사회적인 기억에 대한 공감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엄태근 전시 기획자는 “이 전시는 단순한 도형에서 시작된 추상적 탐구가, 개인의 이야기, 시대의 기억, 사회적 맥락과 시각 언어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작가들의 개인적인 언어와 사회적인 배경이 교차하는 지점에 주목한다”라며 “‘네모’는 단순히 도형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과 겹침을 통한 저항이기도 하며, 균열을 품은 침묵이며, 그 틈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고백이기도 하다. 작가들은 개인의 삶과 사회적 조건,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감각적 경험을 사각형이라는 형식에 담아내며, 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회적 기억에 대한 공감의 가능성을 제안한다”라고 밝혔다.

YUN HYONG-KEUN, Blue Umber, 1978, Oil on linen, 21 1/4 x 26 3/4 inches (artwork)54 x 68 cm, 29 1/2 x 35 x 1 5/8 inches (framed), 74.9 x 89 x 4 cmCourtesy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KM gallery and the Estate of Yun Hyong-keun. Photo by OnArt Studio.
YUN HYONG-KEUN, Blue Umber, 1978, Oil on linen, 21 1/4 x 26 3/4 inches (artwork)54 x 68 cm, 29 1/2 x 35 x 1 5/8 inches (framed), 74.9 x 89 x 4 cmCourtesy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KM gallery and the Estate of Yun Hyong-keun. Photo by OnArt Studio.

네 개의 점이 선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형체가 이루듯, 각각의 네모’, 그리고 개별적인 작품들은 하나의 구조를 이루며 보편적인 감정과 이름 없는 기억을 환기한다. 이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 추상의 언어로, 관람자 각자가 그것과 마주하는 순간, 개개인의 기억과 감정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시간이다.

추상화가 4인전 《네모: Nemo》는 리만머핀(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13)에서 8월 9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