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다가올 추석 한가위, 우리 옛 선조들은 어떤 술을 즐겼을까? 우리 민족이 예부터 여럿이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한 기록은 언제부터 내려올까?
정연식 서울여대 명예교수가 지은 〈한국식생활문화〉에서는 《후한서》 열전을 이야기한다. 1세기부터 3세기 중국 변방 민족의 역사와 풍습을 기록했는데 ‘동이東夷’로 기록한 우리 민족의 음주 풍속만이 풍부하다.
기록에는 북쪽 예濊에서는 ‘무천舞天’이라는 10월 제천행사에 밤낮으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였고, 남쪽 진한에서도 음주가무를 즐겼으며, 마한에서는 농사를 시작하고 마치는 5월과 10월에 귀신에 제사를 지내면서 밤낮으로 술자리를 벌이고 수십 명이 떼로 모여 발을 구르며 춤추고 노래했다고 한다.
《후한서》에서 우리 민족 이외의 기록은 서역의 소그드에 포도가 많이 나서 포도주가 유명하다는 것과 왜에 대해 사람들이 술을 좋아한다는 짧은 기록뿐이다.
술은 고대 제례에서 혼령과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제물이자 축제에서 사람들의 흥을 돋우고 기분을 고양하는 기폭제였다. 조선시대에 예법 표준서인 《주자가례》에는 차례 때 말 그대로 차를 올리라 했지만 우리는 익숙지 않은 중국예법을 무시하고 차 대신 술을 올렸다고 한다.
이렇듯 오랜 세월 음주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는 명절이나 절기마다 어울리는 각기 다른 술을 즐기는 문화가 있었다.
추석에는 동동주, 정월 액막이술, 단오에는 창포주…때에 어울리는 술 빚어
설과 대보름이 있는 정월에는 한 해의 액운을 막고 귀신을 쫓을 수 있는 ‘액막이 술’을 먹었다. 액막이 술로는 후축와 측백나무 잎사귀를 맑은 술에 넣어 우린 초백주椒柏酒나 청주에 귤껍질과 계피, 산초, 도라지 등 가루를 넣어 오려낸 도소주屠蘇酒를 마셨다.
단오에는 알맞게 익은 ‘부의주’에 창포 뿌리를 넣어 숙성시킨 ‘창포주’를 먹었고, 봄 음력 3월에는 청명주, 여름 음력 6월 15일 유두주, 가을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는 국화주를 즐겼다.
한해 수확을 하고 햅곡식으로 지은 술과 송편을 빚어 차례를 지내니 한가위, 추석에는 주로 찹쌀로 동동주를 빚었다고 한다. 앞서 단오에 창포 뿌리를 넣는 ‘부의주’가 바로 동동주를 말한다.
조선시대 왕실 제사 중 가장 큰 종묘제례에서는 초헌에 막걸리를, 아헌에는 동동주를, 종헌에는 맑은 술인 청주를 썼는데 추석 차례주로 동동주를 쓴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동동주는 맑은 청주와 흐린 탁주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밑술이 다 익으면 그중 윗부분이 맑은 술 청주가 되고 아래 가라앉은 것에 물을 조금씩 부어 걸러내면 막걸리가 된다. 그런데 동동주는 술이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아 일부 밥알이 뜬 상태에서 윗부분 술을 떠낸 것이다.
본래 동동주는 술 표면에 뜬 밥알이 ‘뜬 개미浮蟻’처럼 보인다고 부의주라고 했고, 19세기말에 가서 비로소 동동주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부의주와 관련해 가장 오랜 기록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색의 《목은고》이다. 시에서 술을 뜻하는 말로 ‘부의’라 쓰기도 하고 항아리 안이나 술잔에 뜬 밥알을 ‘부의’라고 한 걸로 미루어 고려 때 이미 동동주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조선시대에는 1459년 《산가요록》에 ‘부의주’가 등장하는데 발효를 시작한 지 6, 7일 후 청주를 더 부어 넣고 2, 3일 더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밥알이 일부 떠 있는 상태에서 청주로 덧술을 하여 향을 내고 알코올 도수를 높인 것이다.
또한, 1670년 경 《음식디미방》에는 밥알이 뜬 술로 명확히 기술했다. 덜 익은 술 위에 뜬 흰 밥알을 까만 개미 대신 하얀 구더기에 비유했다. 개미나 구더기보다는 밥알이 동동 뜬 모양새처럼 동동주가 더욱 어울리는 듯하다.
한편, 조선의 명주로는 한산(서천)의 소곡주, 평양의 감홍로, 홍천의 백주, 여산(익산)의 호산춘을 꼽았다고 한다. 그중 감홍로는 춘향전, 별주부전에 등장하는데 자라가 토끼를 용궁으로 데려가려 유혹할 때 말한 달고 붉은빛의 술이며 소주이다.
이외에도 곡식으로 빚어도 과일향이 나는 문배주, 신선과 어울리는 술 이강주 등 다양한 술이 있었다. 이름난 술은 대개 처음 발효를 통해 만든 알코올 함량이 낮은 밑술에 덧술을 내려 알코올 도수를 높였다.

양반들은 집에 손님이 오면 차가 아니라 술을 대접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많으면 서너잔을 마셨지만 대개 한두 잔 정도로 끝냈다고 한다.
반면 서민들은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보다 낮은 술을 더 많이 마셨다. 12세기 송나라 서긍이 고려를 둘러보고 쓴 《고려도경》에 “서민들이 집에서 마시는 술은 맛이 싱겁고 빛깔이 진한데 아무렇지 않게 마시면서 모두 맛있게 여긴다”고 썼다.
희뿌연 탁주를 마셨다는 것인데 탁주에는 이화주, 합주, 감주 등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막걸리이다. 막걸리는 농주라고도 부르며, 농사일로 불러모은 일꾼에게 사정상 밥을 지어 낮참을 제공하지 못했을 때 논밭 주인은 막걸리로 대신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곡식이 많이 소요되는 술을 금하는 금주령을 자주 내렸는데 백성이 힘든 농사일을 하며 틈틈이 마시는 탁주는 금주 대상에서 종종 제외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다양한 술을 즐겼던 터라 조선시대에는 술의 종류가 200여 종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한다. 17세기 쓴 《음식디미방》에는 49가지 술이 기록되었고, 19세기 《주찬》에는 79가지 술 만드는 법이 실렸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개성있는 가양주가 다양하던 조선은 일제강점 때 만들어진 주세법에 따라 술 제조에 세금을 부과하고 1916년 주세령을 공포해 양조 허가를 받은 사람 외에는 술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로 획일화된 몇몇 술만 남아 풍성했던 술 문화가 사라졌다.
다행히 최근 전통주를 되살리는 흐름과 각기 개성을 담아 특색있는 우리 술을 만들고 즐기는 풍토가 만들어지면서 다양성을 회복해가는 추세이다.
한가위에는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일가친척과 흥을 돋우고 기분을 고양시키기 위해 술을 즐기는 자리가 마련되기도 한다. 이때 술이 일정한 한도에 차오르면 새어나가도록 하여 넘침을 경계하는 잔, 계영배戒盈杯의 지혜를 새기는 것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