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조선초 여성의 복장. (왼쪽) 조반(1341~1401)의 부인 계림 이씨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른쪽) 문효공 하연의 부인 성주 이씨(1390~1465) 영정(전주 어진 박물관 소장). 출처 동북아역사문화재단 학술회의 발표자료.
고려말 조선초 여성의 복장. (왼쪽) 조반(1341~1401)의 부인 계림 이씨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른쪽) 문효공 하연의 부인 성주 이씨(1390~1465) 영정(전주 어진 박물관 소장). 출처 동북아역사문화재단 학술회의 발표자료.

- 유교사회에서 복식은 특별한 의미, 공자도 TPO에 맞는 의복착용 강조했다

우리 한복을 비롯해 동양의 복식문화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서울역사편찬원 김윤정 전임연구원은 “동아시아 유교 사회에서 복식은 예禮 질서의 확립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정의했다.

공자는 “군자의 상황에 따른 의복 착용”을 강조했는데 현대의 패선 개념으로 보자면 ‘TPO(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옷이라 하겠다. 맹자 역시 “의례를 행함에 의복이 구비되는 것을 필요조건의 하나”라며 올바른 복식의 착용을 “치국治國의 기본”으로 여겼다. 옷차림이 곧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 청년세대는 지금 한복과 한식(삼계탕, 삼겹살, 김치 등), 한옥 등 한국의 의식주 문화 전반에 대해 중국이 원조이며 한국은 문화수혜국일 뿐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정말 문화가 그들의 주장대로 강대국에서 약소국, 선진국에서 후진국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일까?

기획 2편에서 살펴보았듯 이러한 시각은 20세기 서구 제국주의 확산과정 중 서구의 인종주의, 사회진화론, 우생학 등과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활용된 ‘문화전파론’을 근저에 둔 시각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구도영 연구위원은 “현재는 문화를 우열로 구분할 수 없다는 문화상대주의가 100년 가까이 논의되고, 모든 문화는 섞이고 융합되었다는 연구가 심화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물론 아시아 학계에서 여전히 ‘문화전파론’에 기반한 시각이 적지 않다”고 했다.

지난 7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공동주최로 열린 ‘한국의 옷과 멋’ 학술회의에서 “고려 시대 복식과 ‘고려양(高麗樣)’”을 주제로 발표한 서울역사편찬원 김윤정 전임연구원의 발표에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개최한 '한국의 옷과 멋' 학술회의에서 주제발표를 하는 서울역사편찬원 김윤정 전임연구원. 사진 강나리 기자.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개최한 '한국의 옷과 멋' 학술회의에서 주제발표를 하는 서울역사편찬원 김윤정 전임연구원. 사진 강나리 기자.

원 제국 황실과 명문가, 피지배층까지 확산한 ‘고려양’ 명 초까지 유행

원제국 간섭기 고려에서는 ‘개체 변발’을 포함한 몽골풍이 한때 유행했다. 같은 시기 원 황실 내에 불어닥친 고려의 복식과 쌈 등 음식, 풍속까지 유행한 ‘고려양’은 황실 왕족, 귀족과 평민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 기세는 명나라 초기까지 이어졌다.

고려양의 배경에는 고려 충숙왕 때 원元황실의 궁녀로 입궁해 순제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 황제가 된 기황후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원 소종)의 영향이 크다.

원 말기를 기록한 《경신외사》에는 “기황후는 많은 고려의 미인을 데려다 놓고, 대신 중 권력 있는 자가 있으면 곧 그 여자를 보냈다. 경사京師(수도)의 현달한 관료와 높은 사람들은 반드시 고려 여성을 얻은 후에라야 명문가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고려 여성이 원 황실 또는 지배층과 혼인하는 일은 기황후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원 말 관인 장욱이 쓴 ‘궁중사’의 시에서는 “궁중에서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고려 양식이 새롭게 퍼지고 있었고, 원 궁정에서 유행하던 고려 양식으로 ‘방령에 허리까지 오는 반비’를 입는다”는 내용이 있다.

(왼쪽)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방령상의. 15세기 대전 송효상 묘 출토 방령상의(대전역사박물관 소장). (오른쪽) 원대 방령방비(원대, 중국실크박물관 소장).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왼쪽)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방령상의. 15세기 대전 송효상 묘 출토 방령상의(대전역사박물관 소장). (오른쪽) 원대 방령방비(원대, 중국실크박물관 소장).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중국 내몽골 적봉에서 발굴된 원대 무덤 벽화. 방령방비를 착용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중국 내몽골 적봉에서 발굴된 원대 무덤 벽화. 방령방비를 착용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김윤정 전임연구원은 “‘방령에 허리까지 오는 반비’는 모난 맞깃이 달린 허리까지 오는 짧은 소매의 덧옷이다. 몽골족이나 한족漢族의 복식이 아닌 고려에서 유래한 것”이며 구체적인 형태는 대전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송효상(1430~1490 추정)의 묘에서 출토된 복식을 예로 들었다.

원 황실, 지배층과 혼인한 고려 여인들을 통해 고려 복식과 음식문화가 전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외에도 초기에 요동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점차 그 거주 범위가 대도大都 등으로 확장되고 그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4세기 중엽에 대도를 왕래하는 혹은 대도에 거주하는 고려인에 관한 기록이 있고 《고려사》에도 당시 원 제국 곳곳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을 상정한 기록이 있다.

몽골풍, 고려의 왕실과 지배층, 평민까지 확산했으나 강한 거부감

반면, 고려에서는 사정이 다소 달랐다. 원종의 아들이자 원제국 간섭기 원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처음으로 ‘충忠’이 들어간 왕호를 사용한 왕이 충렬왕(재위 1274~1308)이다. 태자 시절 고려가 원에 굴복하자 원나라에 입조해 연경(지금의 북경)에 머물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원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었다.

최초의 국제결혼을 한 충렬왕이 왕위계승을 위해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와 귀국했을 때 반갑게 맞이한 백성들은 몽골 복식과 개체 변발을 한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몽골 복식과 풍습 중 특히, 고려사람에게 생경한 것이 개체 변발이다. 북방 유목민족들이 옆머리를 땋아 올리는 변발을 하고 앞머리만 내리고 둘레 머리를 깎는다.

김윤정 전임연구원은 “고려에서는 죄를 지었을 때 머리를 깎아 ‘노두露頭’라고 하는 맨머리를 했기 때문에 머리 깎는 것을 터부시했다”며 “죄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맨 머리인 사람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반드시 머리쓰개인 관冠 또는 모帽 등을 착용했다”라고 했다.

고려 충렬왕의 '의관개변령' 이후 몽골풍 의복을 입은 고려의 신하. 쿠빌라이의 황후인 차브이가 쿠빌라이를 위하여 고안해 원의 대표적 관모로 자리잡은 발립을 쓰고 있다. 왼쪽은 이조년(1269~1343) 초상이고, 오른쪽은 이포( ~1373)초상(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고려 충렬왕의 '의관개변령' 이후 몽골풍 의복을 입은 고려의 신하. 쿠빌라이의 황후인 차브이가 쿠빌라이를 위하여 고안해 원의 대표적 관모로 자리잡은 발립을 쓰고 있다. 왼쪽은 이조년(1269~1343) 초상이고, 오른쪽은 이포( ~1373)초상(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또한, 김 전임연구원은 고려와 원(몽골) 전쟁 때 몽골군에 포로로 피납된 고려인들은 강제로 개체 변발을 했고, 몽골군에 투항한 고려인들은 자발적으로 몽골 복식과 개체 변발로 몽골에 대한 소속감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몽골전쟁의 폭력성과 기존에 오랑캐라며 몽골에 대해 지니고 있던 멸시와 부정적 인식과 결합되어 이들 문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몽골풍으로 ‘의관 개변령’을 반포한 충렬왕을 비롯해 원 제국과의 혼인 관계로 고려 왕위계승권을 확보한 왕들을 통해 몽골풍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고려인들은 오랜 기간 향유해왔던 고려의 복식문화와 확연히 다른 원 제국의 복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고려사》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원 제국에 대한 충성과 신뢰에 따라 고려 왕위를 교체하던 시기, 충숙왕이 원으로 가던 중 아들 충혜왕을 황주에서 마주했는데 아들이 몽골풍 호복과 몽골식 의례를 행했다. 그러자 충숙왕은 “너의 부모는 모두 고려인인데, 어찌 나를 보면서 호례(胡禮, 오랑캐의 예식)를 행하느냐? 또 의관이 너무 사치스러우니 어찌 딴 사람에게 보일 수 있겠는가? 속히 옷을 갈아입도록 하라”고 엄하게 훈계하니 왕(충혜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갔다는 내용이다.

이후 공민왕(재위 1330~1374)은 즉위 후 개체 변발과 호복이 ‘전대의 악습’이라는 신하의 상소에 기다렸다는 듯이 고려 복식으로 환원한다. 이 시기 원 제국의 세력이 기울고 명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김윤정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은 “‘의관개변령’을 반포한 지 반세기가 지나도 개체 변발과 호복은 고려의 문화 속에 완전하게 들어오지 못한 이국의 문화”였다고 분석했다.

고려양과 몽골풍의 사례를 통해서 강대국의 문화라고 반드시 약소국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풍속과 취향, 문화에 대한 사회인식에 따라 패션을 포함한 문화를 수용하는 자세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구도영 연구위원은 “패션과 문화의 정치학 측면에서 문화와 유행은 일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쌍방간 교류되고 공유되고 융합되는 국면이라는 점을 역사적으로 재음미할 주제”라고 했다.

그는 “세계 모든 지역과 민족들은 서로 문화를 주고받았다. 문화를 수용하는 가운데 주체적인 자기 결정력이 개입되어 문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그 문화 수용의 선택이 오랜 시간을 거치며 타자와 구별되는 독특한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며 “또한 외부 문화와 각 지역의 로컬성이 결합하여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기도 했다. 한국도, 중국도 그러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