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우리 삶에서 필수요소인 의식주 중 동물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바로 복식 문화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향과 동경, 그리고 사회 집단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종합문화이자 정체성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우리 옷 한복을 둘러싼 한중 문화충돌을 이야기한다.

명나라 초기 수도인 남경(소주지역)에서 유행한 조선의 '마미군'패션. '명헌종원소행락도'를 통해 황궁의 궁인들이 마미군을 입어 하의가 우산처럼 퍼진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명나라 초기 수도인 남경(소주지역)에서 유행한 조선의 '마미군'패션. '명헌종원소행락도'를 통해 황궁의 궁인들이 마미군을 입어 하의가 우산처럼 퍼진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 조선 전기 무려 폭 5.5m(아파트 2층 높이) 치마 ‘마미군’패션 짐작

“〈마미군〉은 조선에서 시작되어 경사(京師, 남경)로 유입되었다. 경사 사람들이 사서 입었으나, 아직 이를 직조할 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부유한 상인과 귀공자, 기생들만 입었는데 이후 무신들도 많이 입었다.”

15세기 중후반 당시 명의 수도 남경(소주 일원)에서 조선의 옷이 크게 유행했다는 명나라 관료 육용(1436~1497)의 문집 ≪숙원잡기≫의 내용이다. 하지만 육용은 명나라의 ‘강남 스타일’이 되어버린 마미군 패션이 몹시도 거슬렸나 보다.

“(마미군을) 입은 사람이 날로 많아져서, 성화 황제(명 헌종, 재위 1464~1487) 시기 말에는 조정 관료들도 많이 입었다. 아랫도리에 허황되고 사치스럽게 옷을 입는 자는 예쁘게 보이고자 할 뿐”이라며 각로, 예부상서의 실명까지 일일이 거론하며 비꼰다.

또한, “어린 후작과 백작, 부마 중에는 활시위로 옷자락을 꿰어 입는 자까지 있었다. 대신 중 마미군을 입지 않는 이는 이부시랑 여순 한 사람뿐이었다”고 했으니 명 황실까지 점령한 마미군의 위세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렇듯 황제의 성 안팎 부유층을 강타한 조선의 드레스 패션은 명 정부가 대단히 우려할 만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부유층의 사치는 물론 군수품인 관청 군마의 갈기와 꼬리털까지 잘라가 군마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고 한다. 명대 학자 풍몽룡이 집성한 《고금담개》의 내용이다.

결국, 홍치제(재위 1487~1505) 초기 마미군 착용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난 후에도 명의 패션 도시 소주지역에 살았던 남경사람들은 북경 거리에서 마미군 패션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명대 학자 심덕부(1578~1618)의 《만력야획편》에 명나라 관료들이 즐겨 입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이 후안무치했다”고 비판했다.

마미군은 말총으로 만든 속치마로, 대슘치마를 상상하면 된다. 사진 담인복식미술관 소장.
마미군은 말총으로 만든 속치마로, 대슘치마를 상상하면 된다. 사진 담인복식미술관 소장.

그럼, 원나라 간섭기에 원 황실을 비롯한 귀족, 상인 등을 사로잡은 고려의 패션 ‘고려양’에 이어 곧바로 명나라를 강타한 〈마미군〉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미군은 말총, 즉 말의 갈기와 꼬리털을 직조해 만든 속치마로, 서양의 페티코트(petticoat)처럼 하의를 부풀려서 가벼우면서도 풍성하고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만드는 기능을 했다. 이를 입으면 겉옷이 우산처럼 퍼진다고 했는데 〈명헌종원소행락도〉 그림 속 궁인들의 차림을 보면 남녀 모두 치마와 겉옷 하의 부분이 우산처럼 부풀어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구도영 연구위원은 “주로 육지와 멀리 떨어져 면포를 구하기 어려웠던 제주에서 면직물 대신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말의 털을 이용해 직조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한복의 속옷 중 모시에 풀을 먹여 제조하는 ‘대슘치마’를 상상하면 된다”고 했다.

지난 7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한국의 옷과 멋' 학술회의에서 발표하는 구도영 연구위원.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지난 7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한국의 옷과 멋' 학술회의에서 발표하는 구도영 연구위원.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그런데 명나라 사람들을 그토록 사로잡은 마미군이 정작 주산지인 한국에서 한복의 일부로 전하진 않는다. 짐작하건대 조선문화의 핵심지역인 수도 한양 등과 멀리 떨어진 섬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제품인 데다가 이를 충분히 대체할 직물이 있는데 굳이 구하기 어려운 말총으로 만든 제품을 선호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한편, 국내에서도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기록이 나온다. 당시 조선에서는 말총 옷을 ‘종의鬃衣’라고 불렀다. ≪성종실록≫에 특진관 유자광이 1490년 “제주에서 수령들이 불법적인 일을 많이 하는데 종의를 짜기 위해 마미(馬尾, 말의 꼬리털)와 마렵(馬鬣, 말의 갈기)을 다 잘라가 거의 다 없어졌다”는 보고내용이 나온다. 명나라에서 발생한 일이 조선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유자광은 “최부라는 사람이 풍랑으로 제주에서 중국(남경과 가까운 해안)으로 표류했는데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이 ‘종의를 가지고 왔는가?’ 묻고는 없다고 하자 ‘전에 (제주에서 온) 이섬은 종의를 많이 팔았는데 너만 없는 걸 보니 가난한 유생이구나’라고 했다”는 내용까지 전하며 “강력하게 종의를 금지해야 한다”고 읍소했다.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 1500년대 경기도 양주의 남양 홍씨 묘에서 발굴된 한복 복원품. 치마 폭이 550cm 아파트 건물 2층 높이로, 이런 치마를 입기위해 가벼우면서 볼륨감을 살려줄 속옷이 필요했다. 사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 1500년대 경기도 양주의 남양 홍씨 묘에서 발굴된 한복 복원품. 치마 폭이 550cm 아파트 건물 2층 높이로, 이런 치마를 입기위해 가벼우면서 볼륨감을 살려줄 속옷이 필요했다. 사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또한, 마미군 패션을 짐작할 조선의 유물도 있다. 경기도 양주 남양 홍씨 묘에서 출토한 한복을 복원하면 치마의 폭이 5.5m로 아파트 건물 2층 높이와 맞먹는다. 이런 치마를 끌리지 않게 입으려면 가벼우면서도 볼륨감을 살려줄 속옷은 필수였던 것이다.

현재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한 복원된 거들치마를 보면 치마 앞을 접어 올렸고, 치마의 앞면은 95cm, 뒷면은 129cm로 19세기 서양의 화려한 드레스 패션과도 견줄 만하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