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말 유학자 김부식은 송나라 휘종과 흠종 시기 고려 사신으로 송에 파견되었는데 이때 관복을 둘러싼 송 조정에서의 일화를 《삼국사기》에 회고한 바 있다.

“신이 상국(上國, 송) 사신으로 세 번 봉행했는데, 일행의 의관이 송나라 사람과 더불어 차이가 없었다. (중략) 너무 일찍 도착하여 자신전 문 앞에 서 있는데 합문원 한 명이 와서 묻기를 ‘어떤 사람이 고려인 사자使者인가?’라 하여 ‘내가 그러하다’고 하니 웃으면서 갔다.”

왼쪽 고려의 장군 강민첨( ~1021) 초상(178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오른쪽 북송 3대 황제 진종(968~1022) 초상(청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동 시대 고려 장군과 중국 황제의 복식이 매우 흡사하다.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왼쪽 고려의 장군 강민첨( ~1021) 초상(178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오른쪽 북송 3대 황제 진종(968~1022) 초상(청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동 시대 고려 장군과 중국 황제의 복식이 매우 흡사하다.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우리 옷, 한복과 관련해 고대에서 조선까지 의복 중 유독 관복이 중국과 비슷한 형태가 많아 일상복이나 여성 한복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 속에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서울역사편찬원 김윤정 전임연구원이 지난 7월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공동 주최한 ‘한국의 옷과 멋’ 학술회의 주제발표에서 한복 중 관복이 중국과 유사한 형태를 취하는 이유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겠다.

조선 건국 직후 편찬된 《고려사》에는 고려 시대 복식과 관련해 “동국(東國, 우리나라)은 삼한 때부터 의장과 복식은 ‘토풍’을 따랐다. 신라의 태종무열왕 때 이르러 당나라의 의례를 따를 것을 청하여 이때 이후 관복의 제도는 점차 중화를 따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우리나라의 복식이 고대부터 중원의 제국諸國(여러나라)와 다른 고유한 형태였다는 것이다. 복식의 차이는 서로 다른 기후와 토양, 생활 습속 등에 기인하고, 복식이 일차적으로 생활환경과 축적된 역사문화 등을 기반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구분과 차이는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집무 시 착용하는 공복에 관해 진덕여왕 때 김춘추의 요청으로 당의 의관을 도입한 후 자‧비‧녹‧청紫緋綠靑 즉, 자주색과 붉은색,녹색, 청색 4색 포와 어대, 홀 등이 결합한 의관을 입었다. 당시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약소국이던 신라가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나라와 연합을 추진하던 시기이다.

고려의 복식 문화는 매우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고구려 계승을 표명한 고려의 태조 왕건의 동상(1992년 북한 개성 현릉 인근에서 발굴)에서 착용한 관모는 통천관通天冠이다. 고대 복식문화 중 통천관은 진시황제 이후 중국 황제의 관모 가운데 하나였다.

왕건의 통천관은 상단에 해와 달을 형상화한 원형판이 함께 구성되어 중국의 통천관과 차이를 보였다. 고려의 통천관은 건국 초부터 국왕의 조복으로 자황포柘黃袍와 함께 착용했다.

김윤정 전임연구원은 “중국의 복제에 따르면 ‘천자天子’로 자처한 중국 황제만이 ‘황색’을 착용토록 했는데 고려에서는 비록 중국왕조와 형식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수립하고 있었음에도 고려 국왕은 별도로 자황포를 그 복제로 마련해 활용했다”라고 했다.

(왼쪽부터) 태조 왕건 동상(고려, 북한 개성 출토), 수락암동1호 고분벽화(10~13세기, 북한 개성 소재),  고려 후기 문신 권준(1281~1352) 묘 벽화(14세기, 파주 서곡리 소재). 고려는 시대별로 복식에서 다양한 변화를 나타낸다.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왼쪽부터) 태조 왕건 동상(고려, 북한 개성 출토), 수락암동1호 고분벽화(10~13세기, 북한 개성 소재), 고려 후기 문신 권준(1281~1352) 묘 벽화(14세기, 파주 서곡리 소재). 고려는 시대별로 복식에서 다양한 변화를 나타낸다.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 자료집.

한편, 관복은 당‧송제를 참작했는데 관인들이 일상에서 착용하는 복식이나 일반인들의 복식은 이와 달리 한족(韓族, 한국인)의 의복을 착용해 중국 복식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의 역사부터 정치, 경제, 풍습 등 다양한 문물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동이(東夷, 우리나라)의 풍속이 자국과 매우 다르다고 했다.

그는 “(당나라에 이어) 우리 송에 이르러 해마다 사신을 보내므로 자주 의복 일습을 내렸다. 점차 우리 중국풍(華風)에 젖게 되면서 천자의 총애를 입어 복식 제도가 개선되어 우리 송의 제도를 한결같이 따르게 되었다”고 자문화 중심주의적 사상인 중화주의자의 입장에서 표현했다.

또한, 서긍은 “그렇지만 관직명이 일정하지 않고 조정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이 다르므로 이러한 예를 열거하여 관복도(冠服圖)를 그린다”고 했으니 관료들도 집에 돌아가면 고려의 복식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후 원제국 간섭기 고려의 원종은 원 세조 쿠빌라이에게 “의관은 고려의 풍속을 따르게 해달라”며 원과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문화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원고려기사》에 의하면 원 세조 쿠빌라이는 “의관은 본국(고려)의 풍속을 따르고 위아래로 모두 고치거나 바꾸지 말라”고 답했다.

그런데 원종의 아들이자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충렬왕은 1278년 전국의 관리들에게 몽골풍 개체 변발과 호복으로 바꿀 것을 지시하는 ‘의관개변령’을 반포했다. 원의 강제가 아닌 전적으로 고려의 자발적 결정이었다.

김윤정 전임연구원은 “정치외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각종 외교 현안들에서 고려의 이익을 관철하고 원으로부터 지속되는 불신을 종식할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쿠빌라이를 직접 만날 상황에서 양국 사이 우호적 관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외교의 수단으로 함께 가는 신료의 개변을 요구했다. 같은 복식문화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양국의 신뢰관계를 좀더 돈독하게 하고자 한 것”이라 했다.

그러다 원명 교체기 공민왕은 국왕이 입는 면복(구장복)을 명에서 사여賜與받고 명나라 관제를 따랐다. 원나라로부터 자주운동을 전개하며 몽골식 복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었다.

하지만, '고려관복=중국관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가 필요한 부분에 한해 중국식 관복을 수용하였고, 고려의 상황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변용해 활용하였다.

1370년 공민왕이 고려 관인의 조복 운영에 관해 내린 교서에서 "상아홀과 홍정, 조정, 초, 라로 된 조복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지금부터는 시신(侍臣, 왕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 외에 동서반 5품 이하는 목홀, 각대, 명주, 모시로 된 조복을 입도록 하라"라고 했다. 

고려에서 생산되지 않는 품목을 명에서 굳이 수입하지 말고 당시 고려의 생산환경에 적합한 것들로 대체하라는 것이다.

김윤정 전임연구원은 결론에서 “고려는 ‘다원적 천하관’을 보유하며 소위 ‘중화中華’를 비롯해 주변 민족들의 다양한 문화를 모두 수용하였다. 이러한 모습이 고려의 복식문화에도 반영되었다”며 “당송요금원명과 풍토가 달랐던 고려에서는 타문화와 구분되는 자신들의 복식문화를 구축하고 있었다. 새로운 문화가 자신에게 필요할 경우에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신들의 문화로 흡수하여 나갔다”고 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 “명나라의 건문제로부터 구장복을 사여받아 이를 기본적인 왕의 면복으로 삼았다”고 기록했고, 명나라 사신 황엄이 면복과 왕비복을 가져온 기록도 상세하다. 중국 황제로부터 따로 왕복과 왕비복을 하사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신라 김춘추를 비롯해 고려와 조선 등 역대 왕조에서는 우리 고유의 복식문화 중 특히 관복을 고도의 정치‧외교적 도구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