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일본에서 환수한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 경자'의 표지. (오른쪽)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경자 권수제면. [사진 문화재청]
(왼쪽) 일본에서 환수한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 경자'의 표지. (오른쪽)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경자 권수제면. [사진 문화재청]

일본에서 환수한 서애 류성룡 선생의 대통력(달력)이 지난 24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처음 공개되었다. 대통력 유물의 정식명칭은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 ‘경자’(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庚子’)》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인 1600년 경자년 달력 여백과 날짜마다 서애 선생은 그날의 날씨, 자신의 소소한 일정, 수많은 방문객, 조보(朝報) 등을 통해 전해 들은 중요한 소식들을 짤막하게 적었다.

류성룡 선생은 고향인 하회마을에 은거하는 동안에도 무척 분주한 일정을 보냈음을 알 수 있고,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어 그의 일상을 짐작케 하며 흥미로운 내용도 있다.

특히, 본문 기록문 중에서 술 제조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있다. 구급주(救急酒)를 만드는 방법을 비롯해 ▲감주(甘酒) ▲향기로운 탁주(香醪) ▲찹쌀술(粘酒) ▲도인주(桃仁酒) ▲백자인 술(栢子酒) 등을 제조하는 법이 나와 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백자인 술에 대해 “무릇 술을 제조할 때는 피백자(皮栢子, 껍질을 벗기지 않은 잣) 약간을 깨끗이 씻어 겉껍질을 제거하면 흰 살을 벗길 수 있으니 이를 찧어서 삼베 주머니에 담고 먼저 항아리 밑에 넣으면 이를 백자인 술이라고 한다.”라고 기록했다.

술에서 깨는 방법도 기록했다. “말린 칡을 불을 가까이하여 훈증하고 잘라서 씹어 즙을 삼킨 뒤에 버린다. 자주 이와 같이 하면 사람을 술에 취하지 않게 한다. 또 술에 취한 뒤 칡넝쿨 한 줄기를 차처럼 짙게 달여서 복용하면 쉽게 술을 깬다.”

하지만, 일자별 기록 중에는 술을 마신 내용이 10월 1일에 “내 생일에 술을 조금 들었다”는 것만 있다.

명의 허준이 지은 한의학서적 ≪동의보감≫에는 술에 대한 기록이 3,526번 나온다. 대표적인 한약재로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 감초보다 2배 가까이 등장한다. 술은 적절하게 복용하면 혈액순환을 돕고 피부, 머리카락, 오장육부 등 인체의 가장 깊고 먼 곳까지 약 기운을 이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류성룡의 술에 대한 관심은 의술에 조예가 깊은 그의 면모로 추정된다.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 경자' 6월의 기록부분. [사진 문화재청]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 경자' 6월의 기록 부분. [사진 문화재청]

류성용 선생의 일상을 살피면 만년에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옥연정사(玉淵亭舍)와 관련된 내용이 많아 무척 정성으로 가꿨음을 알 수 있다.

“정월 25일 배로 옥연으로 건너가서 보허대에 소나무를 심고 저녁에 돌아왔다. 2월 24일 옥연에서 모란을 심고 저녁에 돌아왔다. 3월 9일 옥연으로 갔다. 3월 15일 옥연의 매화가 홀로 푸르다, 5월 2일 옥연에 가서 보허대에 대나무를 심었다 …” 등. 옥연정사는 1586년 유성룡이 하회의 낙동강 건너 부용대 기슭에 세운 정자이다.

달력인 만큼 날씨와 관련된 기록이 자주 나오는 데 경자년에는 지진이 두 번 있었던 듯 하다. “10월 15일에 우레가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11월 11일에는 한밤중에 지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어났다”고 했다. 이외에 2월 1일 기록에는 “저녁에 흰 무지개가 해를 에워쌌다”는 기록이 있다.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 경자' 7월의 기록부분. [사진 문화재청]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 경자' 7월의 기록 부분. [사진 문화재청]

가족 중 어머니와 관련한 내용도 있다. 3월 16일에는 “모친을 받들고 옥연에 가서 꽃을 구경하고 저녁에 돌아왔다.” 3월 18일에는 “모친이 변비를 앓았다.”

3월 22일 “모친의 체후(건강상태)가 조금 안정되어 연속으로 익기탕(益氣湯)과 인삼차(人蔘茶)를 복용하니 기운이 더욱 소생하였다. 밤에 자는데 조금 안정되었다.” 3월 23일 “통유탕(通幽湯, 변비약)을 올리고 새벽에 익기탕(益氣湯)을 올렸다.” 등이다.

모친에 대한 지극한 효심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의술에 뛰어났던 류성용 선생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의술과 관련해 그는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에게 조언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일자별 기록 중에는 6월 5일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갔던 의병장 강항(1567~1618) 선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지방관인 부사의 고목(告目)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 나온다. 강항 선생은 일본에서 3년 만에 돌아와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과 풍속, 지리 등을 기록한 《간양록》을 저술했다.

대통력을 통해 류성룡 선생의 면모와 일상, 1600년 경자년의 다양한 일들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