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로 인해 몸이 허해지기 쉬운 여름 보양식 삼계탕. 사진 한식진흥원 한식포털 갈무리.
무더위로 인해 몸이 허해지기 쉬운 여름 보양식 삼계탕. 사진 한식진흥원 한식포털 갈무리.

올여름의 마지막 고비인 말복이 10일로 다가왔다. 올해는 태풍 ‘카눈’으로 인해 비바람이 예상되지만, 그동안 폭염과 열대야에 지쳐 몸이 허해진 상태에서 복달임 음식 ‘삼계탕’은 빠질 수 없는 한국의 대표 보양식이다.

동서양에서 닭 요리는 보편적인 요리이다. 그러나 닭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속에 곡류와 약재를 넣어 만든 요리는 다른 나라 국물음식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음식이다.

닭은 오래전부터 한국인의 주요한 동물 단백질 공급원으로 요리법이 다양했는데 조선 시대 요리서의 닭 요리법은 외국 요리서를 인용한 것이 적고 우리 고유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중국 요리서에는 닭보다 거위나 오리, 기러기 등의 요리법이 많다.

또한, 우리나라는 국, 탕, 백숙, 고음, 곰, 곰탕 등 다양한 국물 요리가 발달해 조선시대 조리서에만 약 400여 가지 국이 기록되었다. 그런데 탕湯은 원래 국이 아니라 ‘탕약, 탕재, 쌍화탕, 십전대보탕’과 같이 약에 사용하는 용어였다.

이와 관련해 한국미술연구소 정희정 책임연구원은 ‘한국인의 여름나기, 삼계탕의 연원과 발달’리포트에서 “약으로 병을 치료하기 전에 음식으로 몸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식치食治’, 의약과 음식은 사람을 보양하는 동일한 원천이라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이 라는 한의학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 사대부 계층 '식치食治'에 대한 높은 이해, 약재가 음식으로 수용되는 요인

그런데 약재를 일상의 식재료로 사용하려면 그 사회에서 약재에 대한 이해가 매우 높아야 한다. 더구나 약재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어 조심스러운데 약재인 인삼이 음식 재료가 된 것은 그만큼 인삼을 잘 알고 다룰 줄 안다는 의미이다.

정희정 책임연구원은 “조선 시대 사대부 계층에게 의학지식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상식에 가까웠다”며 “식치 개념과 식치방에 대한 이해도는 약재가 음식으로 수용되는 데 주요한 동인이 되었을 것”이라 했다.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재위 1776~1800)도 의술에 대한 조예가 뛰어났다고 하며, 일본에서 환수해 지난해 11월 공개한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대통력(달력, 현대의 다이어리)에는 구급주(救急酒)를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기도 했다.

한편, 정희정 책임연구원은 삼계탕의 연원과 관련해 “북한에서는 삼계탕을 ‘인삼닭곰’이라고 한다. 이처럼 ‘삼계탕’ 또는 ‘계삼탕’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삼계탕에 해당하는 음식을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먹었으리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닭을 조각내지 않고 배 속에 여러 부재료를 넣어 조리하는 음식의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초 세조 때 출간된 《식료찬요》(1460)이다.

출산 후 몸이 허하고 야위었을 때 하는 음식 처방으로, 멥쌀과 불에 구운 식물 뿌리(생백합)를 누런 수탉의 배 속에 넣어 삶아 익히는 조리 방식이 삼계탕과 유사하다. 특히, 해당 음식이 허증虛症에 먹는 처방인 점에서 몸이 허해지기 쉬운 여름에 즐기는 삼계탕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조선 시대 닭 속에 재료를 넣은 대표적인 요리로는 ‘칠향계七香鷄’가 있다. 닭 속에 도라지와 생강, 파, 천초, 청장, 초, 기름 등 7가지 재료를 넣고 중탕한 음식인데 홍만선(1643~1715)은 《산림경제》에서 “칠향계가 닭 요리 가운데 으뜸”이라고 평했다.

정희정 책임연구원은 “도라지는 인삼과 약성 및 형태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삼계탕과 비슷하다”라며 “더욱이 조선의 조리서들에는 칠향계를 ‘속방俗方의 음식’이라 하여 우리나라 토속음식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고 했다.

한편, 한반도를 대표하는 약재로, 조선 이후 동아시아 최고의 상품 가치를 지닌 인삼은 언제부터 음식에 들어갔을까?

재배 인삼.  자연에서 채취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인삼 재배가 성공하면서 18세기 후반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사진 동북아역사리포트 갈무리.
재배 인삼. 자연에서 채취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인삼 재배가 성공하면서 18세기 후반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사진 동북아역사리포트 갈무리.

닭에 인삼이 들어간 음식으로 직접 언급된 기록은 조선 후기 의서의 인삼과 닭을 함께 사용한 ‘고膏’가 있다. 김윤식(1835~1922)의 일기 ‘속음청사’에서 “1887년 9월 16일 기氣가 없을 때 ‘삼계고’를 먹는다”고 했고,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1838~1900)는 《동의수세보원(1894)》 제2권에서 소음인병에 쓰는 24가지 처방 중 ‘계삼고’를 기록했다.

이보다 앞서 정조가 《동의보감》의 요점을 추려 저술토록 한 《제중신편》의 ‘계고’의 내용을 보면 “가난한 집에서 기운이 허한데 인삼 재료 등을 구하기 어려우면 생도라지, 생강 등의 재료를 넣어 만든다”고 했다.

정 책임연구원은 “이 시기에 형편이 어려운 집이 아닌 일반 가정에서 인삼 복용이 가능했다는 의미”란 점에 주목했다. 한국 인삼의 효능은 삼국시대부터 확인되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중국과 일본 등을 비롯해 세계적인 무역상품으로 각광 받았다.

자연에서 채취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인삼 재배가 시작되었고 18세기 후반 한반도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1800년에는 인삼재배를 다룬 농서가 저술될 정도였다.

조선의 인삼재배 확산, 식재료로 쓸 수 있을만큼 가격 낮아져

인삼재배가 성공하자 인삼 가격은 낮아졌다. 이규경(1788~?)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인삼재배가 널리 퍼진 후 번창해 지금은 그 값이 도라지와 같을 정도”라며 “재배 인삼이 모싯대나 도라지처럼 저렴해지면서 인삼정과와 같이 전에는 없던 요리가 생겼다”고 했다.

반면,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청 왕실은 유일한 인삼 생산지였던 만주 지역의 인삼 재배를 불법으로 규정해 인삼의 인공재배를 엄격히 금지했으며, 조선에서 비싼 가격에 수입해 먹었다. 이로 인해 19세기 조선의 인삼업은 크게 확장한 반면 청의 인삼업은 붕괴되었다.

이후 근대 조리서에 나오는 닭국과 백숙, 영계백숙은 닭 속에 인삼가루와 찹쌀을 넣은 요리로, 방식이 삼계탕과 거의 일치한다. 1917년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 속 닭국의 조리법은 “닭을 잡아 내장을 빼고 그 배 속에 찹쌀 3숟가락과 인삼가루 1숟가락을 넣고 쏟아지지 않게 막아서 잡아맨 후 물을 열 보시기쯤 붓고 끓이느니라”라고 소개했다. 근대 조리서를 통해 닭에 인삼을 넣은 요리가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희정 책임연구원은 “닭을 이용한 요리는 세계 보편적이지만, 국물음식에 닭의 형태를 유지하며 여기에 귀한 약재인 인삼을 넣은 삼계탕은 인삼의 종주국 한국에서만 나타난다”라며 “한국의 보양음식 삼계탕은 한국의 음식문화 속에서 탄생하고 발전한 음식”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