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1대 왕 영조(1694~1776)가 재위 50년을 맞은 1774년 3월 21일 왕세손(훗날 정조, 1752~1800)와 함께 궁궐 안 여러 곳을 돌아보고 그 감회를 글로 남겨 현판에 새기도록 했다. 81세의 할아버지 왕은 23세의 왕위계승자에게 무슨 뜻을 전하고자 했을까?

영조가 재위 50년이던 1774년 왕세손과 함께 경봉각, 홍문관, 춘방, 승정원을 둘러본 후 감회를 적은 '어제 억석년회천만' 현판. [사진 문화재청]
영조가 재위 50년이던 1774년 왕세손과 함께 경봉각, 홍문관, 춘방, 승정원을 둘러본 후 감회를 적은 '어제 억석년회천만' 현판. [사진 문화재청]

이날 영조는 왕세손과 함께 중국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보관하던 경희궁의 전각인 경봉각(敬奉閣)을 찾아 참배하고, 왕의 자문기관 홍문관(弘文館), 세자의 교육담당 기관으로 세자시강원이라 불리던 춘방(春坊), 왕의 비서기관 승정원(承政院) 세 곳을 돌아보았다.

홍문관에서 영조는 《시경(詩經)》의 풍천장(風泉章)을 강론했고, 춘방에서 왕세손에게 성군이 되기 위해 익혀야 할 내용을 담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읽게 했다. 이것은 제5대 문종(1414~1452)이 당시 집현전에 나아가 밤낮으로 학문에 몰두하던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왕과 왕위계승자가 성군의 도리를 익히고 자기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공부한 것을 중시한 것이다.

영조가 왕세손과 찾아간 승정원과 춘방.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유튜브]
영조가 왕세손과 찾아간 승정원과 춘방.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유튜브]

영조는 이날 할아버지와 손자가 경봉각을 참배한 일, 승정원과 춘방을 찾아간 일, 홍문관과 춘방에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강독한 일, 이 세 가지를 그 자신 81살에 할 수 있었음을 천만뜻밖이라고 했다.

또한, 중국 고대 요임금이 태평성대의 세상을 노닌 것처럼 영조가 올해 궁궐을 노닐고 있는 일, 한나라 광무제(서기 전 6~57)가 1년간 남양지역에 부역을 면해준 것과 영조가 삼원(三院) 즉, 세 관서의 아전과 하인에게 1년간 부역을 면제해 준 일들이 모두 우연히 서로 부합한 것이 천만뜻밖이라며 그 개요를 기록해 후손에게 보이고자 했다. 영조는 감회를 글로 적고 현판으로 만들어 후대에 전하게 했다. 승정원 호방승지 이재간에게 글씨를 써 삼원에 걸도록 했고, 첩(帖)으로 만들어 가져오게 했다.

영조가 옛일을 생각하며 글을 적은 현판이 ‘어제 억석년회천만(御製 憶昔年懷千萬)’ 현판이다. 어제는 ‘왕이 글을 짓다’라는 뜻이며, 억석년은 ‘옛날을 생각하니’, 회천만은 ‘회포가 천만가지이다’라는 뜻이다. 이 현판의 뒷면에는 한글 묵서로 ‘츈방 셔남’이라고 적혀있어, 세자시강원인 춘방의 서남쪽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궐도안>에서 춘방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나, 『궁궐지』에 의하면 승정원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가 쓴 '어제 억석년회천판' 현판 뒷면. 한글 묵서로 '츈방 셔남'이라 적혀있어 해당 현판은 춘방(세자시강원) 서남쪽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유튜브]
영조가 쓴 '어제 억석년회천판' 현판 뒷면. 한글 묵서로 '츈방 셔남'이라 적혀있어 해당 현판은 춘방(세자시강원) 서남쪽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유튜브]

국립고궁박물관은 ‘어제 억석년회천만’현판은 11월 큐레이터 추천 왕실유물로 정해 공개한다. 조선의 국왕 전시실에서는 이번 현판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건물일 태백산사고 실록각에 걸었던 ‘실록각’현판, ‘고종이 왕세자 순종의 서연을 보고 지은 시를 새긴 현판’ 등을 감상할 수 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궁궐과 별궁, 행궁, 종묘 등 조선왕실 관련 건축물에 걸렸던 궁중현판 775점이 소장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