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으로 중국의 최북단 지방과 높은 산으로 연결되어 있어 완전히 섬은 아니다.”, “이곳의 겨울은 무척 춥고 눈도 많이 내린다. 1662년 사찰에 갔을 땐 사람들이 눈 속에 굴을 내어 다니기도 했다.” “이 나라에는 사원과 사찰이 대단히 많은데, 모두 경치 좋은 산속에 있으며 해당 고을의 관리를 받는다.”

17세기 조선에 표류한 하멜이 쓴 기록 속 조선의 모습. [사진 강나리 기자]
17세기 조선에 표류한 하멜이 쓴 기록 속 조선의 모습. [사진 강나리 기자]

“조선의 언어는 다른 나라의 언어와 다르다. 그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글자를 쓴다. 첫 번째는 중국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고, 두 번째는 굉장히 빨리 쓰는 글자로서 화란의 필기체와 비슷하다. 세 번째는 여자와 평민들이 사용하는 글자로 배우기가 쉬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쓸 수 있다.”

369년 전 거센 폭풍우와 파도로 인해 낯선 나라에 표류한 네델란드인 헨드릭 하멜(1630~1692)이 본 17세기 조선의 모습이다. 상선 직원이던 그는 제주도에 표류한 1653년 8월 16일부터 일본으로 탈출한 1666년 9월 4일까지 조선에서 겪은 13년 28일간 삶을 기록했다.

하멜전시관이 있는 여수 종포해양공원 항구. [사진 강나리 기자]
하멜전시관이 있는 여수 종포해양공원 항구. [사진 강나리 기자]

하멜의 흔적은 그가 첫발을 들였던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용머리해안의 하멜상설전시관, 중간 정착지였던 전남 강진군의 하멜기념관, 그리고 그가 마지막 머물던 전라좌수영(여수)의 하멜전시관에 기록되어있다.

그중 2012년 10월 개관한 여수 하멜전시관은 여수 종포해양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하멜이 탈출을 시도한 여수 구항 방파제 끝에는 인상적인 빨간색 하멜 등대가 서 있어 밤이면 여수항과 광양항을 오가는 선박을 위해 불을 켠다.

하멜 일행이 조선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여수 구항 방파제 끝단에 빨간색 하멜등대가 서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하멜 일행이 조선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여수 구항 방파제 끝단에 빨간색 하멜등대가 서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전시관 앞에는 그의 고국 네델란드를 상징하는 풍차와 하멜의 고향인 호르큼시에 있는 것과 같은 1.2m 높이의 하멜 동상이 서 있다. 전시관 1층에는 17세기 네델란드와 조선의 서로 다른 상황과 하멜 일행이 탄 상선 스페르베르호의 항로가 기록되어있다.

 

여수 하멜전시관. 네델란드를 상징하는 풍차와 하멜의 고향 호르큼시에 있는 것과 같은 규모의 하멜동상이 서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여수 하멜전시관. 네델란드를 상징하는 풍차와 하멜의 고향 호르큼시에 있는 것과 같은 규모의 하멜동상이 서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17세기 네델란드는 에스파냐로부터 독립국을 선포한 후 뛰어난 기술력과 항해력을 기반으로 해상무역의 황금기를 맞았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를 갖춘 동인도연합회사(VOC)를 설립해 동아시아로 진출해 나라 간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이윤을 거뒀다.

반면, 조선은 상황이 달랐다. 교역이 활발하던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나 향가에도 아랍상인이 등장하는 고려와 달리 유교를 국시로 하던 조선은 상업보다는 문(文)을 중시했다. 특히 1592년~1598년까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세에 매우 수세적이었다.

하멜전시관 1층. 해상무역의 황금기를 맞은 네델란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세에 방어적이었던 17세기 조선의 상황이 나타나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하멜전시관 1층. 해상무역의 황금기를 맞은 네델란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세에 방어적이었던 17세기 조선의 상황이 나타나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네델란드의 부흥과 함께 태어난 하멜은 20세 때 선망의 대상이던 동인도연합회사에서 선원생활을 시작했다. 1651년 동인도연합회사 서기가 된 하멜은 스페르베르호에 승선했다. 스페르베르호는 네델란드어로 ‘새매’라는 뜻으로 다섯 개의 돛과 30여 개의 대포를 갖춘 범선으로, 길이 91m, 넓이 18m, 두께 0.6m인 1천 톤급 배였다고 한다.

1653년 새로 부임하는 코넬리스 씨살 총독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포르모사(지금의 타이완)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은 하멜 일행은 7월 16일 포르모사 항에 도착했다. 1653년 7월 30일 다시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에도시대 막부가 네델란드와의 교역을 허락했던 인공섬)로 가던 스페르베르호는 거센 풍랑 속에 8월 16일 좌초되어 일행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아 제주도에 도착했다.

하멜전시관 1층에는 당시 조선의 판옥선과 하멜일행이 탔던 네델란드 범선 스페르베르호를 비교한 모형이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하멜전시관 1층에는 당시 조선의 판옥선과 하멜일행이 탔던 네델란드 범선 스페르베르호를 비교한 모형이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전시관 2층에는 낯선 조선 땅에 표류한 하멜 일행이 13년 28일간 머물던 삶의 모습이 그려졌다. 일행은 그들보다 먼저 조선에 표류했다 귀화한 네델란드인 박연(얀 얀스 벨테브레)를 만나 조선을 떠날 수 없다는 조선 왕 효종의 전언을 받았다. 조선의 상황을 외부에 알릴 수 없던 효종은 “너희가 새라면 날아가도 좋지만, 어떤 외국인도 이 땅에서 내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후 일행은 한양에서 효종을 만난다.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박연이 훈련도감에서 ‘홍이포’와 같은 화포 기술로 활약하고 있었기에 하멜 일행을 훈련도감에 배치했다. 청나라 사신 일행을 통해 탈출하려던 하멜 일행은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부임하는 사령관에 따라 일행의 생활은 달랐다. 때로 여행할 자유를 얻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하기도 한다.

전남 강진에서 남원과, 순천, 여수로 보내진 스페르베르호 선원들, 그중 전라좌수영(여수)에서 3년 6개월을 보낸 하멜 일행은 1666년 9월 4일 탈출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전남 강진에서 남원과, 순천, 여수로 보내진 스페르베르호 선원들, 그중 전라좌수영(여수)에서 3년 6개월을 보낸 하멜 일행은 1666년 9월 4일 탈출했다. [사진 강나리 기자]

극심한 가뭄과 질병으로 함께 생활하기 어려웠던 일행은 순천과 남원, 여수로 분산되었다.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에서 3년간 지낸 하멜과 11명은 이도빈 수사를 만나 노역에서 풀려나 따뜻한 대우를 받고 함께 배가 있는데 왜 도망가지 않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그리고 1666년 9월 4일 뱃놀이를 가는 듯 꾸며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했다. 일행 중 7명은 본국으로 돌아갔고, 1668년 조선에 남아있던 선원 7명이 송환되어 하멜과 함께 1669년 고국 땅으로 돌아갔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로 갔을 때 탔던 통구민 배 모형. [사진 강나리 기자]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로 갔을 때 탔던 통구민 배 모형. [사진 강나리 기자]

고국에 돌아간 하멜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 동안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그간의 일들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가 쓴 《하멜표류기》 혹은 《하멜보고서》로 불리는 기록은 은둔의 나라, 조선을 최초로 유럽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멜전시관은 이방인의 눈으로 본 17세기 조선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여수를 여행하면서 한 번쯤 들러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