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좇아 가다보면 한반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대륙, 즉 만주를 넘어 북방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6,000년 전 한반도 및 만주 전역에 살고 있었던 빗살무늬토기 인들은 중국 한족이 사용하던 토기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무늬인 빛의 파형을 묘사한 무늬를 토기에 그려 넣었고, 이러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지역에는 단군조선의 지표유물이라고 일컫는 비파형 청동검과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대한민국의 첫 출발점이자 뿌리 역사인 단군조선의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북방지역인 요서 및 요동 등 만주 전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다 아우르는 지역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단군조선이 붕괴한 이래로 민족의 이합집산으로 열국 시대를 맞이했고, 이때 등장하는 여러 나라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으로 재편되었으며, 끝까지 남았던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은 고대국가로 성장 및 발전해 나갔으며 우리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데 삼국 외에 말갈을 비롯한 흉노, 선비, 돌궐, 거란, 몽골, 여진 등 북방계통의 민족들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지금도 교류와 소통 등을 통해 사회가 발전한다. 인간의 행태를 보면 고대 사회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단군조선 이래로 고구려와 발해를 거치면서 같은 역사 공간에 있었던 북방만족들의 역사를 보면 동일한 자연환경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융합과 분리를 반복하면서 형성된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 역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만주 하면 우리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대개 삼국 중 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가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그것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겠지만 고대에는 국가 존립과 이해득실에 따라 관계의 성격이 달랐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통해 단군조선 붕괴 이후 1차 민족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구려 영토의 상당 부분을 당에 빼앗기기는 했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는 통일 전쟁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 전쟁의 과정은 우리만 겪은 것이 아니다. 북방 민족들 간에도 동일한 통일 전쟁이 일어났고 시대에 따라 흉노, 선비, 돌궐, 말갈, 거란, 여진, 몽골, 만주 등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하였다. 이역만리 떨어진 터키인들은 생김새도, 언어도 다르지만 한국을 형제 국가로 여기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많은 병력을 파병하기도 하였고, 북방만족들은 단군조선의 영향으로 탱그리 신앙으로 일컫는 천신숭배의 천제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고구려 발해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국경도 만주에 있었다

역사를 좀 안다는 사람들마저도 발해 이후 우리 역사에서 만주가 사라졌다고 알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 교과서에는 통일신라의 국경이 대동강에서 원산만으로 되어 있고, 그 위쪽은 당의 영토이거나 발해의 영토였다가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면서 만주는 우리 역사에서 멀어졌으며,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 등을 수용한 고려가 민족의 재통합을 이루었다. 고려의 국경도 역사 교과서에는 청천강에서 영흥만으로 되어 있으나 사료적 근거는 전혀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에 국경사를 새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국경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로 통일신라의 국경은 사료의 근거에 따라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 용정시까지 북쪽으로 올라간다. 고려와 조선의 서북 국경도 만주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고려 때 서희가 되찾은 강동 6주, 윤관이 설치한 동북 9성, 원과 명이 설치한 철령위, 조선 세종 때 설치한 4군과 6진 등 모두 한반도 내가 아니라 지금의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와 발해뿐만 아니라 근세조선까지도 만주는 우리 역사와 함께한 것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한반도 내로 고착화 되어 있다. 그것마저도 남ㆍ북한이 분단된 채 두 세대가 지나갔다. 대일항쟁기 동안 우리 역사는 조선총독부의 반도사관에 의해 반도 안에 갇혀버렸고, 식민주의 사관에 의해 축소, 왜곡, 삭제된 역사가 현대사의 시작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나라의 주권은 다시 찾았으나 민족은 남ㆍ북한 체제로 양분되었고, 역사는 아직도 온전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으로 왜곡 및 날조된 우리 역사가 광명을 되찾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관심을 두고 정부 차원의 노력과 학자들의 양심 있는 연구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만주를 비롯한 북방사는 공백

앞서 북방계통인 말갈과 한민족 간의 일정한 관계를 언급한 바 있었다. 말갈과 여진 같은 숙신-읍루계, 거란과 몽골 같은 동호-선비계, 돌궐 같은 흉노계 등 북방민족들의 역사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 역사의 공백을 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만주를 비롯한 북방사는 공백이다.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가 존재하지만 정작 북방사에 관한 연구는 그것에 못 미치고 있다. 중국이 북방지역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고자 할 때 우리가 고구려와 발해에만 집중하는 것은 고구려와 발해를 제외한 역사 시기에는 북방이 우리 민족의 역사 공간이 아님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 관한 관심은 고구려와 발해에 편중되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인정할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이렇게 편중된 관심과 노력만으로는 한국의 고대 역사와 문화의 규명이라는 커다란 흐름을 이어 나가기 힘들다. 말갈 같은 북방계통의 집단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혈연적인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들의 환경에 적응해 왔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자 다른 생활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시대를 거치며 그 범위가 확대되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였다. 러시아 학자들은 19세기 동아시아 지역의 원주민들을 퉁구스족과 고아시아족으로 분류하기도 하였지만, 이것을 예멘계와 숙신ㆍ읍루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한반도 중에서도 남한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의 공간적 배경은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이었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옥저, 동예 등의 무대가 북한과 만주 지역이기 때문이다. 북방으로 올라가면 이름만 알려져 있고, 자세한 생활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역사가 많이 숨어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기층민이었던 말갈과 같은 집단들은 한국 고대사의 일부 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다루어지지 못한 채 소외되거나 이민족의 역사로만 여겨져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 역사 기록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다. 문헌 자료가 부족한 여러 민족의 역사는 변방 또는 주변의 역사로 취급됐다. 다행히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후속 연구 덕분에 만주를 비롯한 북방지역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들이 그 주인을 제대로 찾게 되었으며, 막연했던 북방 민족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알려졌다.

우리 역사에서 북방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포함하는 지금의 동북아시아 지역

그렇다면 한국사에서 북방지역은 어디일까? 바로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포함하는 지금의 동북아시아 지역이다. 만주는 동 북 삼성(랴오닝성, 길림성, 헤이룽장성)과 내몽고자치구 및 허베이성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중국의 영토이다. 흉노, 선비, 유연, 돌궐, 물길, 말갈, 거란, 해, 실위, 몽골, 여진 등 북방만족들은 지금의 중국 영토에서 일어나서 성장하였고 때로는 대제국을 이루기도 하였고, 때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가 사라지기도 하였다.

반면 연해주는 러시아의 영토이다. 옥저와 읍루처럼 고대 사회에서 기후와 자연환경을 극복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갖추었던 북방 민족, 한때는 역사를 주도하기도 하였지만, 현재는 그 존재마저 희미해졌다. 이러한 북방 민족들이 한민족의 역사 및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를 알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은 잊고 있었거나 외면했던 역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죽은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로 재탄생시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주체들과 대화를 통해 소통하고 그들의 말에 경청하고 역사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같은 북방 민족이지만 한민족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말갈과 북방 민족들 간의 관계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을 통해 한국 고대사 및 동북아시아 고대 역사 인식 체계 확립에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한민족과 말갈 vs. 말갈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한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나라(민족)들과 말갈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말갈이 한민족과의 친연성뿐만 아니라 한민족을 구성하는 일정한 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말갈과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발흥한 여러 북방만족들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한다면 한민족과 북방 민족들 간에도 그 연결고리가 있다고 하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고대 숙신은 단군조선이 본격적으로 중국 한족에게 알려지기 전에 중국 한족들에게 먼저 알려진 존재이다. 처음에는 단군조선과는 종족 구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나 중국 한족들이 압박에 못 이겨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현지 퉁구스계와 융합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 한족의 압박을 물리적으로 이겨내려면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후에 단군조선이 숙신에 대체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과 동북아시아 북방 민족 간의 관계사를 통해 혈연적, 문화적, 언어적 융합이 일어났고, 그것이 종목명이 다를 뿐 북방유목 민족으로서 동일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고대 유목 사회에서는 혈통을 중시하고 이동을 통한 선진문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빠른 기동력과 자유자재의 활쏘기 실력은 단기간 내에 세력을 팽창시킬 수 있었다. 말갈 또한 동일한 전철을 밟았으며 다른 북방 민족들보다는 늦었지만, 오히려 잠재된 역량이 발현되어 최후의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선진문화와 천하의 중심이라는 천하관을 고스란히 넘겨받은 덕택이었다.

지금도 동북아시아는 역사 전쟁을 치르고 있다. 우리 역사는 대일항쟁기를 거치면서 너무 많은 생채기가 났다. 이제 피해의식의 발로로 우리 역사만 부각하거나 확대하여 해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인정하고 실체를 정확하게 연구한 결과를 공유하고 나라마다 이견이 있으면 충분한 학술 토론을 통해 역사적 갈등을 해소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북방 민족과 말갈 간의 관계사 연구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고대 역사 인식 체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이었다.

말갈은 실체가 있는 집단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른 북방유목 민족과 혈연적 융합과 고도의 선진문명을 가진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 고유한 문화를 만들었으며 내부 역량을 키워 발해 건국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고, 숙신-퉁구스계의 반란으로 여겨지는 여진족과 만주족을 거치면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말갈이 북방유목 민족으로서 고대 숙신과 단군조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예맥계인 부여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와 서로 다른 관계를 유지하였고, 단군조선과 흉노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신라와도 한반도 내에서 각축전을 벌여 왔다. 말갈은 유목민족의 특성상 광범위한 영역이 있었는데, 동일한 종족 계통으로 보는 숙신, 읍루, 물길, 여진, 만주로 이어지는 숙신-읍루계, 즉 퉁구스계 민족들과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역에 따라 친예맥계(부여, 고구려, 백제, 낙랑, 옥저 등), 친동호계(거란, 해, 실위, 몽골 등), 친돌궐계, 친중국계 등 대외 관계를 달리하는 말갈 집단들이 존재했다. 그 이유는 말갈이 중앙집권 형태가 아니라 촌락 단위로 흩어져 있어 지정학적 위치, 정치적 상황,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독립적으로 대외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말갈은 고구려군의 용병이 되어 수와 당을 끝까지 괴롭히기도 하고, 나당전쟁 시에는 거란과 같이 당나라 군대에 편성되어 신라를 괴롭히기도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문왕 때는 신라의 중앙군사조직인 구서당 중 제6서당인 ‘흑금서당’의 일원이 되어 신라왕의 친위부대 역할을 하였다. 돌궐이 거란을 요서 지역에서 몰아낸 이후에는 송화강 유역에 있던 물길 집단이 요서 지역으로 이주해와 요서말갈(속말말갈, 백산말갈)로 친돌궐 또는 친고구려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옥저 지역에는 읍루가 이웃하고 있었는데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초토화되고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읍루가 내려와서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후에 백산말갈이 되어 속말말갈과 함께 고구려의 구성원이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말갈에서 발해말갈로 변신하여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발해 건국 후에는 말갈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발해의 기층민이 되어 발해 역사와 문화의 발전을 이끌었다. 발해는 동아시아 역사의 변방이었던 극동 지역을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 올려‘해동성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발해가 주변의 제 종족들을 통합하고 힘을 합쳤기 때문이며, 춥고 황량한 지역에서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낸 비결은 훗날 거란이나 여진이 각각 요와 금 제국을 일으키는 데 큰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결국 말갈의 후예인 여진족은 후금에 이어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갖게 된 청 제국을 탄생시켰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말갈로서 고수 및 고당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도록 견인차 구실을 했던 말갈은 전쟁 후 당으로부터 참혹한 학살이라는 보복을 당하기도 하였고 발해 건국 후에는 5경 15부 62주 중 막힐부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거란족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면서 일부는 고려, 요, 돌궐, 당, 여진 등으로 흩어졌지만 또 다른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훈족(흉노), 아바르족(유연), 튀르크족(돌궐) 등의 전철을 밟아 서유럽 지역에 강력한 인상을 남겼으며, 지금 헝가리의 건국 주체가 되었다.

21세기, 왜 북방인가?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풀꽃들을 우리는 야생화라고 부른다. 풀꽃의 생명력은 정말 경이롭다. 조그마한 공간만 있으면 척박한 환경에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말갈이 그러한 존재였다. 분명 독립된 문화를 갖고 고유한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으며,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때로는 주인공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왔다. 만주족이 숙신ㆍ식신ㆍ읍루ㆍ물길ㆍ말갈ㆍ여진 등으로 불리면서 만주와 한반도에 살아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신라ㆍ백제와 싸웠고 고구려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발해의 건국을 도왔다. 여진족은 근세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와도 좋은 관계를 맺었다.

21세기, 왜 북방인가? 북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 체계 확립이 필요한 이유는 단군조선 이후 한국사가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말갈 및 북방민족의 존재는 한국사의 판도를 확 바꿀 수 있는 역할을 했다. 고조선과 후대의 역사를 연결해 주고 우리 민족을 이루는 제 종족 간의 관계 정립과 단군조선이 어떻게 붕괴되었는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지방정권의 역사로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적극적으로 맞설 수 있는 대응책이 될 수 있으며, 북방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역사 흐름을 읽어내고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마주한 역사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