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 바야흐로 봄이 시작됐다. 그러나 막상 입춘 날 아침 꺼내 입은 옷은 여전히 두툼한 패딩이다. 봄이 되면 얼어붙은 땅도 녹고 그 땅에 새싹도 올라와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김장독에 오줌독까지 깨는 입춘 추위’라는 말만으로도 노곤해졌던 마음이 다시 얼어붙는다.

양력으로는 2월 초. 아직은 매서운 이 날이 어째서 봄의 시작이라는 걸까?

사실 하늘은 벌써부터 봄을 준비했다. 12월 22일 동짓날은 1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인데, 이날을 기점으로 태양의 길이는 조금씩 길어졌다. 동짓날 이후, 하늘은 이미 봄을 맞이한 것이다.

이렇게 해가 길어지면 겨우내 얼어있던 지구가 데워지기 마련인데 말 그대로 시나브로 데워지다 보면 한 달 반쯤 지나 땅으로 천천히 봄이 도달한다. 땅의 봄날, 그날이 바로 ‘입춘’인 것이다.

땅의 봄날로부터 또 한 달 반가량 지루한 태양의 데우기가 이뤄지다 보면 마침내 사람에게도 봄이 느껴진다. 그때쯤이면 우리도 ‘아하, 봄이 왔구나.’를 뒤늦게 체감하게 된다.

24절기(節氣)는 농부의 달력이다. 언제 씨를 뿌릴지, 언제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할지를 입춘부터 대한까지 쭉 따라가다 보면 한 해의 농사가 마무리 된다. 그러니 절기는 땅을 중심으로 한다. 그래서 절기는 늘 사람이 느끼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다.

올해 임인년(壬寅年) 입춘시(立春時)는 오전 5시 51분이었다. 입춘시는 매년 바뀌는데, 태양의 중심이 황경 315도에 일치하는 때를 그 해의 입춘시로 정한다.

이 시간에 맞추어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입춘첩을 붙이는 것이 가장 길(吉)하다는 세시풍속 때문에 필자도 올해는 깜깜한 이른 새벽부터 입춘첩을 준비했다. 문 앞에 입춘첩을 붙이고 보니 유난히 입춘의 ‘입(立)’자가 눈에 들어왔다.

봄이 시작됐다면 봄에 들어선다는 ‘들 입(入)’이 더 자연스러운 표현일 텐데 입춘은 어째서 ‘봄을 세우다’(立)라는 낯설고 어색한 표현일까?

문법은 대상에 대한 사유를 그대로 드러나게 해준다는 면에서 입춘의 글자에도 옛사람들의 철학이 담겨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봄에 들어선다’(入)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시공간에 ‘나’라는 존재가 그냥 쏙 들어가는 모양새다.

반면 ‘봄을 세우다’(立)라는 표현은 조금 더 늘어난 햇볕과 따뜻한 동풍, 깨어나는 생명과 생명이 하나로 어우러져 시공간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생동감을 떠오르게 한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다함께 봄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계절을 만들어가는 주체이지 관찰자가 아니다. 변화를 만들어가는 움직이는 공동체에는 종(種)의 구분이 없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계절의 기(氣)를 주관한다.

농사를 짓고 절기력으로 살던 사람들의 사유 속에는 이런 철학이 녹아있었으리라.

입춘에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써서 길운을 빌고, 동지에 팥죽을 챙겨 먹는 우리의 세시풍속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과는 완벽히 다른 낯선 전제에 대한 궁금증, 시공간과 존재 사이의 틈새 없는 의문, 새로운 매트릭스와 호기심들이 삐죽삐죽 솟아난다.

그렇다면 입춘 날, 봄의 기운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봄철 석 달을 발진(發陳)이라고 하는데 천지가 모두 생겨나고 만물이 자라난다. 이때는 밤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찍 잠자리에 든다. 천천히 뜰을 거닐고 머리를 풀고 몸을 편안하게 하며 마음을 생동하게 한다. 무엇이든 살려야지 죽여서는 안 되고 주어야지 빼앗아서는 안 되고, 상을 주어야지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봄기운에 호응하는 것이니 양생의 방법이다.” <동의보감 내경편 신형 중>

동의보감에 보면 봄에 할 일들이 나와 있다. ‘발진’의 한자는 ‘필 발(發)’에 ‘베풀 진(陳)’으로 만물을 키워내고 살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입춘의 세시풍속도 의미가 깊다. 먼저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은 입춘 시기에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을 해놓는 것이다.

거지의 움막 앞에 밥을 한 솥 해놓는 다든지, 아무도 모르게 쓰레기를 치운다든지 말이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은 인연을 따라 점점 번져나간다. 얼마 전 유행했던 아이스버킷 챌린지의 시작은 입춘의 적선공덕행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 ‘아홉차리’ 풍속은 입춘 시기에 무엇을 하든 아홉 번을 하는 것이다. 글도 아홉 번을 읽고, 새끼를 꼬아도 아홉 번을 꼬고, 밥을 먹어도 아홉 번을 먹는 등 열 번을 채우지 않는다.

10은 동양에서 완전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약간 모자란 듯 일을 남겨 놓고 이후에도 계속 일을 이어갈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는 것이 이 풍속의 숨은 뜻이다.

입춘의 모든 풍속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는 좋은 기운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해 주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절기력의 모든 풍속은 그저 재미삼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절기력이 농부의 달력이라지만, 우리에게도 1년을 사는 농부의 마음이 있다. 1년 중 가장 추운 이때, 농부는 1년 동안 무슨 농사를 지을 것인지 골똘히 궁리를 했다. 근 한 달 동안 농사의 가닥을 잡았다면 구체적인 출발점을 마련하는 때가 바로 지금 입춘기이다. 종자를 골랐다는 것은 이미 1년을 결정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입춘이 되면 농부는 올 가을에 무엇을 수확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종자의 종류에 따라 파종의 시기와 수확의 시기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입춘 무렵, 1년의 계획을 펼쳐야 한다. (발심) 그 계획이 눈앞에 그려지고 손안에 잡힐 수 있을 것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내가 고른 1년이 종자가 무엇인지를 펼쳐보고, 파종시기와 수확의 시기를 잘 그려보자.

입춘대길! 바야흐로 봄이다. 봄이라는 시공간을 스스로 세우고, 내가 고른 씨앗을 잘 발아하게 될 조건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봄의 생기와 인생의 신비에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다.

사진촬영 체인지TV 홍대길
사진=체인지TV 홍대길

 

신은정 체인지TV, 브레인셀럽 책임PD

SBS, KBS시사교양국에서 10여 년 간 추적 사건과 사람들, 경찰24시, 병원24시, 그것이 알고 싶다 등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