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과 졸업 시즌이 다가오고 있다. 100세 시대를 맞아 늦은 나이에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늦깎이 만학도가 적잖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그래도 입학식과 졸업식은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청춘들을 떠오르게 한다.

청춘은 젊음과 열정, 꿈, 희망같이 밝고 순수한 에너지를 상징하지만, 그 시절을 통과해온 한 사람으로서 청춘은 어쩌면 불안한 미몽(迷夢)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 해 동안 애써 적응을 하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힘든 일인데, 새로운 학년, 새로운 학교로 진입하는 봄의 출발선은 언제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몸과 마음을 바짝 긴장시킨다.

그래서일까? 새 학기를 시작하는 이 계절의 풍경은 봄이라고 하기에 어쩐지 을씨년스럽고 우울한 색깔과 냄새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과 스트레스는 ‘무지(無智)’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때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공포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고, 신체는 몸살이나 통증으로 힘듦을 호소한다.

봄이 오면 야외활동과 미세 꽃가루가 늘어나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무렵 병원을 찾는 소아청소년 환자가 급증한다는 통계는 이런 심리적인 요인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청춘은 봄이다. 봄은 오행(五行)으로 보자면 목(木)에 해당한다. 목은 성장하고, 쭉쭉 뻗어나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목 기운이 창창하면 공부를 하는 때라고 풀이를 한다. 봄과 청춘, 그리고 공부는 하나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는 무언가를 배우는 ‘공부’를 ‘노동’으로 여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매일 배워야만 살아갈 수 있다. 하물며 작은 곤충들조차 매일 매일 학습을 하는 것이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데, 호모사피엔스인 우리 인간에게 배우는 행위는 스펙 쌓기나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생명의 배움터인 학교는 고된 노동의 현장으로, 그곳에서 만나는 친구는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춘은 그 자체로도 싱그럽고 아름다우니 그만 됐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망언이나 괴담 수준이다. 하지만 필자의 입장에서 많은 문화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듯한 MZ세대들에게 왜 그리 힘드냐고 물어보니 경쟁이 너무 치열하고, 미래가 막막해서 그렇다고들 한다.

사실 유사 이래 그렇지 않은 젊은 세대가 있었던가. 경쟁은 언제나 치열했고, 앞은 보이지 않았건만 지금의 더 큰 문제는 빅뱅 수준으로 빨라지고 다양화된 SNS와 넘쳐나는 정보들이 부모와 청년 세대들에게 앞 다투어 ‘꿈’을 과대 포장하여 판매한다는 점이다.

‘꿈을 크게 가져라’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 ‘꿈 하나로 이룬 성공신화’등. 그럴듯하게 보이는 꿈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성공’과 연결되어 있다.

청춘들이 가져야할 꿈은 다름 아닌 돈과 권력, 그리고 인기인 것이다. 아이돌 스타나 재벌급 창업가가 롤 모델로 끊임없이 나오는 유튜브에는 고급차와 언뜻언뜻 보이는 외제 명품들, 그리고 좋은 집이 등장한다. 오죽하면 ‘관종’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고, 짝퉁을 자랑하다가 퇴출되는 연예인이 나올까.

청춘이 품은 꿈의 리스트에 과연 명상의 달인이라든가 지혜와 창조의 글쓰기 여신이라든가, 매일 2만보를 걷는 걷기 왕 이라든가, 동물해방운동가 같은 목록이 있기나 할까?

꿈의 정의를 떠나 청년세대에게 꿈이 무어냐고 묻고, 강요하는 것은 이제 막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에게 가을의 열매를 강요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청춘을 상징하는 나무에게는 꿈이 필요 없다. 열매를 맺는 순간 그 열매는 떨어지고, 겨울을 맞이할 텐데 어떤 나무가 굳이 그것을 바라겠는가. 대부분의 10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른다. 그게 정상이다. 사람으로 치면 아직 뼈와 근육이 한참 자라는 중인데 어떻게 뜻을 세우고 마음을 정하겠는가.

청춘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 뒤의 막연한 미래보다는 당장 지금의 몸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가 더 급한 문제다. 우리 모두가 그 시기를 통과해오지 않았던가.

온갖 변덕을 부리며 어제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가 내일은 소설가가 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가능성의 시절이 청춘이다.

하지만 오늘의 꿈은 이런 가능성을 성공이라는 경제학과 돈의 정치학으로 수단화시켜버렸다. 꿈이 곧 직업리스트가 된 것이다. 그래서 꿈이 있는 사람은 있어서 힘이 들고,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괴롭다.

문득 오래 전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사가 생각난다. “공부는 왜 하나? 출세하려고 하지. 출세는 뭐 하려고 하나? 돈 많이 벌려고 하지. 돈은 벌어서 뭐하나?” 마지막 질문에 눈을 껌뻑이던 바보는 이렇게 대답한다. “소고기 사 묵지”

중요한 것은 돈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나무의 목표는 열매가 아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싹을 틔우고, 잎과 꽃을 피워 성장한다. 그러다보면 열매가 달린다.

그렇다. 우리는 그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잘 살다보면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루게 된다. 영화 <쿵푸팬더>의 명대사처럼 “어제는 history, 내일은 mistery, 그리고 오늘은! present!” 지금, 여기, 오늘은 그 자체로 너무도 아름답고 귀한 선물이다.

삶의 모든 과정이 선물이지만, 지나보니 새싹이 움트는 청춘의 봄이야말로 어마어마한 선물이다. 이 시간을 만끽하려면 무언가를 이루어야한다는, 꼭 무엇이 되어야한다는 꿈의 헛된 주술에서 벗어나시라. 그저 오늘을 잘 살고, 주변을 사랑하며 내면을 채우는 일에 더 골몰하시라.

성공이라는 세상의 기준에 목메는 순간, 청춘의 아름다운 배움의 순간은 빠르게 지나가 버릴 수도 있다.

많은 어른들이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면서 미리미리 준비해놓아라 채찍질을 하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다)이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봄날도 왔다가 간다. 봄이 오기도 전에 다 피어 버리면, 그 나무는 과연 어떻게 될까? 봄의 새싹과 여름의 열기, 가을의 쇄락, 그리고 겨울의 침잠을 통과하는 동안 나무는 더욱 더 단단해진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청춘이여, 꿈이 없음을 한탄하지 말라. 꽃샘추위에도 그대들이 바로 싹을 틔우는 가능성임을 믿고 마음껏 변덕을 부리며 지금, 여기, 오늘을 그저 잘 살기 바란다.

 

[출처] 프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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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정 체인지TV, 브레인셀럽 책임PD

SBS, KBS시사교양국에서 10여 년 간 추적 사건과 사람들, 경찰24시, 병원24시, 그것이 알고 싶다 등 집필.